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시네마 디스패치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 섹션 - 뉴 노멀

1.

2022년 코로나19 시기에 서점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와서 뭐라도 사가라고 하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뉴욕의 스트랜드(strand) 북스토어는 정말 망할 거 같다고 뭐라도 사달라는 메일을 보냈고 베를린의 두 유 리드 미?(do you read me?)는 수레에 잡지들을 싣고 근처 테이크아웃 전문 에스프레소 카페에서 잡지를 팔았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는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사람들은 예술을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서점을 하다 보면 좋아한다는 마음에 무감해진다. 동시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부담스러워진다. 왜냐하면 대부분 좋아한다고 떠들어대는 말은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고 거짓인 동시에 진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마저 자신의 마음을 진심이라 믿는다. 그래 진심이지. 진실이지. 하지만 세상에 좋아할 것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는 것일 뿐. 좋아함의 순서에서 밀리게 되는 것일 뿐. 그럼, 이것은 좋아하는 것이라 해야 할지,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오늘 전주에 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거기에 가도, 가지 않아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냥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고, 지우고, (내가 간 카페는 그런 사람들이 천지다) 그러다가 그냥 목적성 없는 이 행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다 잠깐 잠들었다. 하지만 카페 주인은 커피 한잔 시키고 책을 읽는 건 허용해주면서 잠드는 건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잠들 곳을 찾아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관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취미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나는 <소설가의 영화>를 보면 모두가 서점을 좋아하고 작가를 좋아하고 시인을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한다는 거짓말쟁이들만 등장하는 그 영화가 일종의 조소로 느껴지기도 해서 또 볼 생각은 없었지만 잠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방문한 영화관에 이렇게 관객이 많은 것은 좀 당황스럽고 심지어 대기석에는 책을 읽는 LP바를 할 것 같은 아저씨, <프리즘오브>를 보고 신기해하는 연인들, 쏟아지는 인파에 뭔가 말끔한 스타일로 변모한 발권소 직원까지…. 낯선 풍경에 나는 옥상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노을을 보고 있을 때 한쪽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다름씨를 만났다.

“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돼요.”

“저 지금 여기서 담배 안 피우면 죽을지도 몰라요.”

“담배가 그렇게 좋으세요?”

“좋아하는 게 아니라 꼭 피워야 해요.”

그의 무례한 흡연에 불쾌해진 나는 다시 영화관으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인가! 하는 와중에 평소와 다른 말끔한 매니저는 영화 곧 시작한다고 얼른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A6에 앉은 아저씨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지 책을 읽었다. 옆에 앉은 연인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있었다. 솔직히 다 위선처럼 느껴졌고 수많은 인파의 웃음소리, 팝콘 먹는 소리, 키스하는 소리(멈춰!) 등으로 숙면에 방해가 되었던 나는 불현듯 일어나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거짓으로 들통날 것을 알면서도 지금의 순간은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마음은 거짓인지, 진심일지 고민해보았다.

2.

그렇게 내가 코로나19 시기 동안 제일 많이 배운 것이 있다면 체념하는 것과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선택에 걸린 수많은 기대, 그리고 결국 충족되지 않은 비대한 기대의 자아는 버려질 뿐이다. 그때마다 체념한 채로, 그러면서 체념하지 않은 채로 방황할 뿐이다. 나는 더이상 해가 갈 때마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려 애쓰지도 않고, 새로운 해가 올 때마다 미래의 나를 그려보는 일도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나인원 한남에 살고 있는 다른 우주의 나다. 그곳의 나는 절도 있는 움직임을 가지고, 문학 따위 읽지 않으며, 해외의 최신 투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산다. 나는 나인원 한남에 방이 몇개인지, 심지어 화장실은 몇개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 알았던 적도 있었고, 예전에는 기억하려고 애썼던 적도 있지만 더이상 그따위 것에 누가 관심을 가진담.) 그곳에서 나는 기능적으로 활동하고, 복합 기능이 가능한 영화관 같은 사람이다. (아 정정한다.) 이 시대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같은 사람이다.

나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대형 스크린에서 보다가 다른 우주의 내가 궁금해져 지금 여기 서울 합정동 종이잡지클럽으로 향한다. 지금 종이잡지클럽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종이잡지클럽을 둘러본다. 이곳이 싫다. 그럴 거 같았다. 이곳은 기능 없는 공간. ‘분명한 기능이 없는’ 곳이 아니라, 분명 기능이 없는 곳. 기능이 결여된 곳. 그 무엇으로도 사용되지 않는 공간. 나는 다시 돌아가 나인원 한남의 화장실이 몇개인지, 방이 몇개인지 세는 것 같은 좀더 기능적인 일에 시간을 쏟고 싶었다. 하지만 종이잡지클럽에는 나뿐이다. 나는 다시 나의 우주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커피를 마시러 나왔기 때문에. 나는 이 모호한 생각을 순종적으로 좇으려 노력했다. 이디야에서 커피를 한잔 시켜서 돌아왔다. 종이잡지클럽으로 돌아가는 동안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거리의 사람들 : 패딩을 입은 사람들, 천천히 걷는 사람들, 서두르는 사람들, 반팔을 입고 달리는 사람들,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 버스킹을 하는 사람, 개들과 걷는 사람들, 그들은 그들의 개들과 닮아 있다. 커플들, 그들은 그들의 연인과 닮아 있다. 지루한 서점인들, 사진 찍는 사람, 손을 흔드는 사람. 응? 멀리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고 왜 저러는 걸까, 같이 손을 흔들어볼까 고민하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종이잡지클럽 왔는데 왜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나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사실 너무 찾아서 문제였고, 대부분 내가 찾은 나는 이미 너무 늙었거나, 아니면 아직 너무 어리거나,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진즉에 죽었거나, 지나치게 무용하거나,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짓말쟁이거나 정말이지 뭐 하나 만족스러운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조우의 한계에 맞닿아 체념할 때마다 완전히 시간을 낭비했다고 할 정도로 체념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어딘가에 썩 나쁘지 않은 (그렇다고 꽤 괜찮다고 보기엔 궁색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체념한 채로, 그리고 체념하지 않은 채로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까닥까닥 손을 흔들며 매장으로 돌아왔다. 매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