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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수평적 존재가 수직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다섯 번째 흉추’ 박세영 감독
정재현 사진 백종헌 2023-08-10

- 영화는 크게 몇장의 챕터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챕터를 나누는 인터 타이틀이 곰팡이의 출생 전후 디데이(D-day)다. 디데이로 챕터를 구획한 이유가 무엇인가.

= 이 작품은 인간이 주인공인 보통의 성장 영화 문법을 따르면 안될 것 같았다. 영화가 곰팡이의 성장 영화라서 곰팡이의 출생 이전과 사망 직전까지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때 곰팡이는 인간처럼 주체적으로 대사를 읊거나 표정 연기를 할 수 없다보니 주어진 제약 속에서 최대한의 도구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디데이로 인터 타이틀을 꽉꽉 채워넣었다. 편집 중에 화면을 보니 많이 비어 보이기도 했고.(웃음)

- 인터 타이틀과 오프닝 크레딧을 모두 독특한 폰트의 알파벳으로 표기했다. 모아쓰기로 표기하는 한글보단 풀어쓰기로 표기하는 알파벳일 때 폰트 디자인이 더 두드러져 영문 표기를 선택했을 것이라 막연히 추측해봤다.

= 존 카펜터의 영화나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 두 사람의 영화에 공통적으로 쓰인 카슬론 앤티크(Caslon Antique)라는 폰트가 있다. 그 폰트를 이번 영화에 꼭 사용하고 싶었는데 한글 지원이 안됐다. 그래서 전부 영어로 썼다.

- 곰팡이 혹은 매트리스가 여행하는 곳은 강북구, 노원구, 도봉구 등 서울의 최북단이다.

= 한국의 로드무비는 서울의 중심지인 명동이나 을지로에서 시작해 제주도로 가는 등 대부분 남하한다. 윗동네에서 시작해 더 위로 올라가는 영화는 없는 듯해서 연직 방향으로 북진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DMZ 직전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촬영 허가가 나지 않아 연천에서 멈췄다.

- 전작인 단편 <캐쉬백> <갓스피드> 등을 봐도 인물들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한다.

= <캐쉬백>을 찍다 부족함을 느껴 <갓스피드>를 찍었고 <갓스피드>의 단점을 보완하며 <다섯 번째 흉추>를 찍었다. 전작의 부족한 점을 차기작에서 수습하는 방식으로 찍다보니 로드무비라는 형식적 동일성이 도출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 영화는 다른 컨셉으로 가고 싶었는데 차기작인 <지느러미>도 움직이는 영화가 됐다. 이젠 정말 달리 갈 것이다.

- 전작들과 <다섯 번째 흉추>의 또 다른 공통점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전부 외자란 것이다. 그리고 이름에 쓰이는 단어들이 보통 이름에 잘 쓰지 않는 1음절 단어다.

=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 경험이 거의 없어 캐릭터의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심지어 초고엔 남자1, 여자1 등으로 인물의 대사를 표시했는데 그 상태로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전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급하게 이름을 부여했다. 사실 네이버에 외자 이름을 검색할 때 고빈도로 나오는 이름들이다.

-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왜 곰팡이는 인간의 등뼈를 탐하나.

= 수평으로 누운 존재인 곰팡이가 직립하기 위해선 근육이나 장기처럼 말캉한 것보단 강직한 척추가 필요하지 않겠나. 결국 <다섯 번째 흉추>는 수평적 존재가 수직적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 처음 탄생한 곰팡이가 마치 보석의 원석 같다. DIY 수준으로 미술감독과 논의하며 곰팡이를 구현했다고 들었는데.

= 미술감독으로 함께한 두분이 사실 프로덕션 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분들이 아닌데도 정말 열심히 작업에 임해주셨다. 영화의 미술을 위해 한국 샤머니즘에 관한 책도 독파하신 분들이다. 곰팡이의 첫 탄생을 자세히 보면, 우리 집 고양이 털과 미술감독의 고양이 털, 집에 굴러다니던 먼지도 막 섞여 있다.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모래놀이하듯 이것저것을 섞어가며 만들었다.

- 율과 준이 들어가는 러브 모텔의 프로덕션 디자인도 상당히 재미있다. 로케이션 헌팅을 한 곳인가.

= 충북 음성에 있는 무인 모텔에서 찍었다. 우주, 던전과 같은 식으로 객실별 테마가 명확하고 그걸 셀링 포인트로 삼는 숙박 업소다. 그곳을 대관해 벽지도 새로 칠하고 침대 커버도 바꿔 씌우는 등 더 조악한 방식으로 내부를 바꾼 후 촬영에 들어갔다.

- 모텔에 들어간 율은 이따금 먼 곳을 응시한다. 율의 시선 끝에 준이 걸리기도 하지만 가끔씩 율은 애먼 곳을 보기도 해 영화의 기괴한 분위기를 한층 살린다.

= 율과 준을 연기한 두 배우가 가장 리허설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둘이 시나리오와 가장 다르게 연기한 배우들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알아서 자신들만의 연기 합을 맞춰왔다. 우리 현장은 스크립터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연기를 했다는 걸 나도 신나게 촬영을 마친 후에 알았다. 다시 그 모텔을 빌려 추가 촬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영화에 그날 촬영분이 그대로 반영됐다. 그 모텔 방은 사방이 거울인 곳이다. 율을 연기한 온정연 배우에게 거울을 통해 준을 바라보라고 디렉션을 줬다.

-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고 재밌는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우문기, 전고운, 임대형 감독이 연기하는 회사원들의 등장 신이 아닐까.

= 처음엔 세 감독에게 고등학생을 연기하도록 시킨 후 교복을 입히려고 했는데, 안되겠더라. (웃음) 그 장면은 온전히 배우들에게 맡겼는데 각 배우가 그 장면을 받아들인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확실히 우문기 감독님은 그 장면을 코미디라 생각하셨다. 애드리브가 엄청 많았는데 현장에서 많이 절제시켰다.

- 내러티브는 친절하지 않다. 윤이 결에게 말한 소원이 무엇인지, 솔이 병원에 입원한 이유는 무엇인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서사를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은 없지만, 복선을 치밀하게 깔고 캐릭터별 디테일을 치밀하게 구축해놓는 통상의 영화와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다르다.

= <다섯 번째 흉추>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감이라 생각했다. 존 카사베티스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의 내러티브를 생각해보면 캐릭터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상황에 끊임없이 던져지지 않나. 캐릭터들이 빠른 속도로 여기저기로 정신없이 이동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보려는 실험이 <다섯 번째 흉추>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차기작부턴 복선도 깔아두고 캐릭터별 디테일도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 루이뷔통, 조르조 아르마니 등의 명품 브랜드와 몇 차례 협업했다. 브랜드와 브랜드 앰배서더의 색깔을 살리며 또 스스로의 연출력도 드러내야 하는 과정이 까다롭진 않은가.

= 브랜드와의 협업은 그야말로 돈을 벌기 위한 작업이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의 제작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브랜드의 필름을 찍는 과정이 상당히 고되다. 15초 정도의 짧은 영상을 위해 500번이 넘는 편집 과정을 거친 적도 있다. 브랜드의 영상 작업은 패션 산업과 맥을 같이한다. 최대한 세련되고 새로워 보이는 작업물을 세상에 빨리 내놓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 소모는 적어야 한다.

- 차기작인 장편 <지느러미>의 촬영이 끝난 것으로 안다. 지금 이 영화에 관해 귀띔해줄 것이 있나. SNS를 보니 닮아 있는 영화로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츠 이야기>, 김기영의 <이어도> 같은 작품을 제시했던데.

= 언급한 영화들은 <지느러미> 촬영에 반영하고 싶은 요소가 들어 있는 작품들인데, 사실 그렇게 못 찍었다. (웃음) 촬영은 지난해에 끝났다. 지금은 한창 후반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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