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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수상 당선자 ‘김신’ 작품비평, Open 24 hours - ‘리코리쉬 피자’를 중심으로
김신 2023-07-15

1차 석유파동 전후의 산페르난도 밸리를 담아낸 <리코리쉬 피자>의 첫 번째 화면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주인공 개리 발렌타인의 뒤편에서 변기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그 직후 영화는 장면을 바꿔 평화롭게 복도를 걸어가는 알라나와 개리가 처음 눈이 맞는 현장을 보여준다. 먼저, 상호연관성이 결여된 두 장면을 이어 붙인 이 몽타주를 다소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몽타주가 여러 사건과 인물을 혼란스럽게 흡수하며 질주하는 <리코리쉬 피자>의 마취적 구성을 집약하는 미장아빔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다. 어쩌면 첫 장면에서 개리가 변기 폭발을 피해 화장실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가 다음 장면에서 복도를 거니는 알라나와 마주칠 수 있었다는 인과론적 추정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두 장면이 시간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근거는 없으므로 우리는 세 번째 해석을 제출해볼 수도 있다. 이게 우발적인 연결이든, 필연적인 만남이든, 딱히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여러 방향성으로 개방된 이 느슨한 접합의 방식이야말로 <리코리쉬 피자>의 무질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시대극을 오밀조밀한 세부로 채우는 리서치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석유파동과 베트남전쟁의 여파 속 여러 디테일과 인물은 선명한 사회학적 인과율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흐트러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인물들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창업 아이템을 갈아타는 개리처럼 역사의 현장 안에 느슨하게 배열된 채 얼기설기 기워져 있다. 첫눈에 반해 알라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개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신문 너머로 알라나를 쳐다볼 때도 지면에 새겨진 포르노 광고를 흘깃거린다. 알라나는 스스로를 영화 속 한 장면에 속한 배우로 소개하던 개리의 첫인사에 “그 수십명 중 네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대답한다. 하지만 몇 장면이 지나면 무대에 오른 수십명의 조연 사이에서 개리의 얼굴을 식별하며 뺨을 붉힌다. 대충 두세 장면 정도가 또 지나가면 개리의 친구인 랜스에게 반해 외도의 궤적을 그린다. 심지어 그 랜스조차 알라나의 가족 식사에 초대받아 몇 마디를 횡설수설한 후에는 화면 밖으로 추방된 뒤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핸드폰이 보급된 이후의 세계를 영화화하는 게 어려워 시대극을 찍는다고 고백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은 동시대의 파편적 징후를 70년대의 풍경에 투사해 재구성했다. 영화를 관통하는 헐겁고 느슨한 공기는 그가 2010년대를 건너오며 점차 전작들을 가로지르던 신경증적이고 역사적인 강박관념과 작별하려 했다는 점과 유관할 것이다. 그전까지도 앤더슨은 지식인적 소명을 선명하게 표방하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물은 한 시대를 가로지르는 병리를 과도하게 수렴해낸 정념의 화신으로 나타나곤 했다. 텔레비전 쇼와 뮤직비디오의 문법을 영화에 편견 없이 수혈했던 <매그놀리아>의 인물들도 속죄를 갈망한다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전통을 내면화한 채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성찰적 대사를 내뱉은 바 있고, 일그러진 석고상 같은 클로즈업을 우당탕탕 디밀던 <마스터>의 탕아 프레디도 첫사랑 도리스와의 추억이 담긴 유년기의 과거와 직면해 “내면의 악”(Inherent Vice)을 길들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이것은 앤더슨이 속죄와 치유를 목적으로 삼았다는 게 아니라, 그 목적의 실질적 달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심리적 외상을 구심점으로 작동하는 시대극을 조직하는 데 몰두했다는 뜻이다.

<리코리쉬 피자>도 성년기를 통과하는 인물들의 성장담을 구성하는 영화다. 하지만 인물들은 속죄와 치유에의 강박으로부터 한층 자유롭다. 서사와 감정의 추이를 암시하는 단서도 치밀한 논리에 종속되지 않은 채 한가롭게 널브러져 있다. 그러므로 <리코리쉬 피자>의 인물들은 아마도 <매그놀리아>의 구절을 비틀어 다음과 같은 대사를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과거를 ‘진짜로’ 잊었기 때문에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으며, 과거도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대신 “평범한 사이즈”의 성기 크기(<리코리쉬 피자>는 랜스와 개리 모두가 말하는 이 특성 없는 범박함에 주목하려 하며, 이는 거대한 성기 사이즈로 포르노 산업의 중추를 누빈 인물을 소묘했던 <부기 나이트>의 기획과의 대조를 예시한다)와 사업가적 독립성을 갖춘 그들은 스스로의 동물적 활력을 길들이려는 이성에의 강박 없이 복수의 시공간을 환승하듯 건너뛴다. 그 증거로, 석유파동의 여파로 자동차가 모두 멈춘 도로 한복판에서 개리는 울기는커녕 “세상이 망했다”고 신명나게 소리치며 흥뚱거린다. 주인공이 앤더슨 필모그래피의 다른 주인공보다 어려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잭 홀든과 존 피터스 같은 어른들 또한 폴 토머스 앤더슨이 애덤 네이먼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말했듯, “최악의 빌어먹을 애X끼들처럼 행동한다”.

종종 거울과 공간으로 프레임을 분절해 인물들이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 미장센은 이런 파편적 세태를 은유하는 주요한 상징이다. 이완된 구성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장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물침대를 판매하는 엑스포에서 난데없이 경찰에 붙잡힌 개리가 이내 누명을 썼음이 판명나 풀려나는 싱거운 시퀀스다. 개리가 풀려난 후, 알라나는 “너 마약 했냐? 사람 죽였냐?”라고 윽박지르지만, 2초 정도 지나면 진상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경쾌하게 질주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인물들이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시대와의 불화를 증언했던 앤더슨의 전작을 떠올린다면 이 장면의 가벼운 뉘앙스는 더욱 두드러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개리와 알라나는 가족에 의한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다. 개리의 집에는 <데어 윌 비 블러드>와 같은 억압적인 아버지의 자리가 애초에 비어 있으며, 주인공을 괴롭히는 <펀치 드렁크 러브>와 <팬텀 스레드>의 사나운 누님들도 자취를 감춘 채 없다. 아버지가 부재한 개리는 심지어 어머니와의 관계도 희미하지만, 그래도 그냥저냥 독립심을 갖춘 채 사업을 벌일 생각에 골몰한다. 대체로 두 주인공의 사정에 무관심한 가족들은 그저 70년대의 시민들이 “집에서 매일 밤 죽음을 기만하고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기 위해 TV를 본다”던 장뤼크 고다르의 관찰처럼(<넘버 2>)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TV나 보며 패스트푸드를 씹을 뿐이다.

쿨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종종 외로움을 타는 <리코리쉬 피자>의 군상이 겪는 소외감은 그들의 정체성이 가변적인 역사적 조건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몇 가지 표지로 구체화된다. 액션 배우 잭 홀든이 영화배우를 지망하는 알라나를 보고 레인보우라는 배역 명이나 그레이스 켈리라는 이미지로 호명하지만, 막상 알라나가 자연인인 본인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는 무감하게 그녀를 내동댕이치며 다른 여인의 이름을 외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화 속 인물들은 안정적인 관계에 정착하지 못한 채 어긋난 신호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불분명하고 거무스름한 실루엣에 감싸인 채 자아의 변주를 겪는다. 실제로 폴 토머스 앤더슨은 알라나가 25살인지 28살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 모호화하는 사소한 대사를 은근슬쩍 기입해두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정치적 이상주의를 설파하는 인물인 시장 후보 조엘 왁스 또한 마이크와 카메라가 자리를 비운 일상에서는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연기를 한다. 어쩌면 잭 홀든의 바이크가 버려둔 알라나의 실루엣이, 달려나가는 개리의 실루엣과 결합하는 장면의 드라마틱한 역광은 두 주인공의 자아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이라는 점을 지목하는 은유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상대의 정체를 식별할 수 없듯 불분명한 기호로 얼룩진 세계에서 두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합일에 이른다. 하지만 종막에서조차 영화는 분열적 기색을 오롯이 남겨두었다. 두 인물은 서로의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각성을 겪으며 화합하는 대신 다른 관계로부터 겪은 혼란과 소외감을 달래기 위한 동기로 급작스럽게 결합하며, 핀볼 가게를 메운 손님들은 “여러분, 알라나 발렌타인을 소개합니다!”는 개리의 말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인물의 개인적 드라마가 도시적 환경과 이격한다는 포스트모던한 징후를 보여주는 연출일 텐데, 관련해서 보다 적나라한 단서는 알라나가 개리를 다시 조우하기 직전의 화면에 음각되어 있다. 그 장면에서 알라나는 어느 건물의 회랑을 달리던 중 “Open 24 hours”라고 쓰인 간판 밑을 스쳐간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정교하게 계산된 도심의 구조와 조명이 주인공의 내면과 탁월하게 조응했다면, 여기서 알라나의 머리를 맴도는 간판의 메시지는 그들의 사랑이 언제든 또 다른 관계에 대해 “24시간 오픈” 될 수 있음을 짓궂게 암시한다. 누아르적 조명 밑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마주하던 <마스터>의 프레디와 도드는 다음 생에 만나자는 영원의 서약을 맺은 채 작별의 서정을 새기고 갔지만, <리코리쉬 피자>의 캐릭터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렇게까지 진지할 의향이 없다. 그들은 그저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순간의 매혹에 몸을 던지며 입을 맞출 뿐이다. 감초처럼 길쭉하게 생긴 여인과 피자 같은 여드름을 지닌 소년의 괴상한 조합이 어찌저찌 하나의 메뉴를 구성하는 찰나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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