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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인의 데구루루] 일곱시에 열두번 우는 뻐꾸기
김세인 2023-06-15

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 했다.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그곳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익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정신없는 관광지인 것을 확인했던 터라 그곳이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인 것은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화산 앞에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또 ‘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요’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스스로 좀 근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아도취에 빠져 케이블카를 타고 산등성이를 한차례 넘자 정거장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별 볼 일 없었다. 그날따라 날이 좋아서 역시 나는 운이 좋다며 신나게 숙소를 나섰는데 날이 심하게 너~무 좋아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 증기도 연기도 신묘한 기세도 아무것도 없이 거대한 공사판 같은 날것의 흙바닥만 먼지를 피우고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수명을 7년 늘려준다는 검은 달걀을 사서 먹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먹자니 목이 막혀 수명이 더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시원한 것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검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샀는데 사진을 한장 찍자마자 고온의 날씨 탓에 초스피드로 흘러내려 엉덩이를 쭉 뺀 요상한 자세로 흡입해야만 했다. 양손이며 흰 운동화며 검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되어서 화장실을 찾아 돌아다녔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자 아이스크림은 분명 입으로 먹었는데 뺨, 눈꺼풀, 코에도 검정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이래서 다들 날 보고 웃었구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산통이 깨져 글은 무슨 글이냐 싶어 그대로 화산을 내려갔다.

화산 앞에 앉아서 드는 생각들에 대해 쓰려고 했지만 소득을 얻지 못해 다른 주제를 찾아야 했다. 꽤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외 별다른 주제가 생각나지 않아 괜히 애꿎게 이전에 썼던 글들만 스크롤을 올리고 내리며 뒤적였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 지난 세편의 글들 모두 과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거였다. 유년 시절과 지난가을, 지난여름….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썼던 각본집에 포함된 에세이들, 장단편의 시나리오들 또한 과거를 돌아보며 쓴 글들이다. 나는 과연 회고적 인간이구나 싶었다. 이러한 기질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쓴 거의 모든 글들이 과거를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하자 민망했다. 일상을 보내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초점이 계속 틀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감각 자체가 현재보다는 과거나 미래로 기울어져 있어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틀어져 몇해 전에는 이거 큰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그 간극을 좁히려 여러 해 동안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고 익혔는데. 이렇게 글의 첫 문장들은 여전히 과거에 놓여 있었다.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지만 정리되고 비로소 쓸 수 있었다. 어떤 글들은 그렇게 숙성의 과정을 거쳐 깊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시들해졌다. 계속 이런 식의 글쓰기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느끼는 것 자체로 담백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스탤지어라든지 어떤 꾸밈을 빌려야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자기 확신이 없는 겁쟁이 글쓰기 방식으로 말이다. 화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곳에 앉아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써내려가고 싶었던 거구나. 그 또한 지금에서야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요즘은 최승자 작가의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를 읽고 있다. 1994년 8월 말부터 1995년 1월 중순까지 하루하루의 지형이 소탈하지만 힘 있게 그려져 있다. 아까워서 급하게 읽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지난가을에는 하미나 작가의 <베를린 유학기>를 구독해 출근길에 읽었다. 정말 놀라운 작가들이다. 존경한다. 뜸 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를 거의 실시간으로 기록해나가는 것이 굉장히 대범하다. 느끼는 즉시 써야지만 담기는 에너지가 분명 있다. 현재의 충만함, 기쁨, 슬픔, 아쉬움, 혼란, 분노, 만족, 창피함, 사랑…. 거쳐가는 수많은 감정을 어떠한 꾸밈도 용납하지 않고 독자에게 건넨다. 작가에게 발생하고 변화하고 소멸되는 어떤 것들이 그대로. 그야말로 날것의 활동들이 담겨 있다. 이러한 글들을 만나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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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뻐꾸기시계를 샀다. 이번 봄에 선생님께서 ‘너의 말이 새소리처럼 상쾌하게 들린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문장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나의 말보다 해사하게 웃으며 말씀하신 선생님의 말이 더 고운 새소리처럼 느껴졌다. 뻐꾸기가 때마다 시간을 알려준다면 그 아름다운 문장처럼 일상도 상쾌하고 청아하고 개운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우리 집에도 친구네 집에도 어딜 가든 뻐꾸기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싼 물건인 줄 몰랐다. 20만원에 가까운 금액으로 시계를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전통 뻐꾸기시계가 아닌 플라스틱 뻐꾸기시계로 구매했다. 그래도 색상은 한층 더 산뜻한 오렌지색이었기 때문에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배달된 시계는 너무 조악해서 깔짝깔짝 흔들리는 시계추도, 엉성하게 색칠된 뻐꾸기도 매우 간사해 보였다. 그래도 울음소리만큼은 우렁찼는데 이 녀석이 일곱시에는 열두번을 울고, 열두시에는 세번을 울고 제멋대로였다. 문도 벌컥 열고 나와 시간에도 맞지 않는 울음소리로 나를 헷갈리게 만들고 할 일 끝내고 문을 획 닫고 들어가는 게 좀 건방지게 느껴졌다. 고양이들은 익숙하지 않는 소리에 정각마다 화들짝 놀라 뻐꾸기 곁으로 후다닥 달려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귀도 수염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허하게 울리는 바보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한동안은 꽤 짜증이 났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어쩐지 가엾게 들린다. 오늘은 저 뻐꾸기를 손 좀 봐줘야겠다. 그래도 완전 애먼 시간이 아닌 정각에는 울기 때문에 조율이 꽤 수월할 거라 예상된다. 뻐꾸기집의 뚜껑을 열고 시계의 톱니바퀴를 세밀하게 잘 조율해봐야겠다. 뻐꾸기가 과거의 울음소리나 미래의 울음소리를 지저귀지 않게. 제때에 맞춰 상쾌하고 개운하게 그리고 우렁차게 울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