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진짜다’ 싶은 표정으로 말하는 인물, 살아 있는 인물
- <나의 해방일지>의 단초가 궁금합니다.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였나요.
= <나의 아저씨>를 끝내고 다음엔 뭐할까, 그 생각을 몇 개월 했어요. 처음부터 목표나 골조를 정확하게 잡고 시작하진 않습니다. 바라는 정서 정도만 있었어요. 가벼웠으면 좋겠다. 해맑았으면 좋겠다. 깔깔거렸으면 좋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경기도민 얘기를 해야겠다. 밭일도 했으면 좋겠고 땀을 흘렸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왜 젊은이들 얘기를 도시에서만 할까. 우리가 <섹스 앤 더 시티> 세대잖아요. 30대가 되면 아무렇지 않게 다들 <섹스 앤 더 시티>를 찍을 줄 알았는데 집도 없고 시티에 살지도 않고. 출퇴근하면 아프고. 내 인생 내가 주도적으로 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게 실패 같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서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어떤 설정이 필요해요. 누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문제를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지. 음모인지 배신인지. 이번에는 아무 설정 없이 가보자고 생각했어요. 저부터가 그런 어려움이 없는데도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것도 아니고 빚더미에 앉은 것도 아닌데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보통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했어요.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 나와 닮은 사람이고 실제의 삶이지만, 이런 주인공으로 어떻게 16부작을 돌파해나갈 생각이셨나요.
= 제가 드라마를 볼 때 서사에 매료되어서 보지 않거든요. 그보다 인물에 매료되어 보는 편이에요. 시청자 중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이 얘기가 어디로 가고 쟤가 어떻게 되는지보다 저 사람을 지켜보는 재미. ‘그렇지, 저럴 땐 저렇지. 저런 표정이 우리한테도 다 있지’ 하면서 인물 보는 재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인물들을 더 진짜 같게 그리는 데 치중한 게 아닐까 싶어요.
- 진짜 같은 인물을 그리기 위해서 <나의 해방일지>에는 어떤 취재가 필요했을까요.
= 49년 경기도에 살았던 경기도민으로서 그 생활을 잘 알고 있었고요. 초등학생 때 집 분위기가 드라마 속 구도와 비슷했어요. 집 앞에 바로 아버지 공장이 있어서 삼시 세끼 집에서 밥 드시고 밭일을 하셨어요. 염미정, 염기정(이엘), 염창희(이민기), 구씨(손석구)의 기본적 속성은 다 제 안에 있는 속성 하나를 부여해준 것이고요. 거기에 저와 다른 직업군을 부여해서 저와 다른 인간이 되게 하죠. 글을 쓸 때 직업군 외에는 자료 조사 하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창희의 경우 편의점 관련 자문 주시는 분을 쫓아다녔어요. 의외로 본사 직원과 점주 사이가 돈독하고 동지애가 있더라고요. “너 결혼하면 축의금 50만원 준다”는 대사도 그때 들었던 얘기였어요. 창희는 직업 얘기가 있어서 편의점 얘기를 충분히 했는데 기정의 경우 관계가 주된 인물이어서 리서치 회사의 재미있는 부분을 제대로 못 쓴 건 아쉬움이 있어요.
▼ 집필 과정에서 작가로서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을까? “별로 없어요. 마쳤을 때 잘 끝났다, 안심하는 정도라고 할까요.” 갸웃하던 박해영 작가가 말했다. “함께 작업실을 쓰던 후배 작가 말이 ‘언니, 글 쓰는 거 좋아해’ 하기에 ‘그걸 어떻게 알아?’ 물었더니 제가 새벽 1시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래요. 10시간 끙끙대다가 뭐 하나 풀렸다고 그렇게 좋아하는 거죠. 그 1분, 이것도 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