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은 우주를 탐험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스타 플릿 우주선의 선원들은 겉보기엔 평범한 우주 군인같아 보일지 몰라도 하나같이 머리가 좋다. 개중에 가장 근육 바보처럼 보이는 선원조차 위기 상황이 오면 온갖 천문물리 용어들을 불경처럼 줄줄 읊어대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똑똑하고 순발력 있는 과학 장교들은 거의 마법사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도대체 어떻게 외딴 복도 구석에 있는 패널 하나를 뜯어 전선 몇개 바꿔 끼우는 것만으로 우주선 전체의 방어막이 10분 더 버티게 만드는지.
이 진보한 과학자들이 우주를 탐험하며 체득한 교훈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왔다. 궁금하다면 <스타트렉>의 첫 시리즈를 다시 한번 찾아보시길.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낡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백인 남성 함장이 온갖 비키니 차림의 외계 여성들과 엮이는 꼴도 우습고, 적대 종족인 로뮬란과 클링온을 다루는 방식도 도저히 섬세하다곤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 낡음을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간 우리가 꾸준히 나아져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 나는 티빙을 통해 서비스되고 있는 최신작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즌4를 감상 중인데, 이 시리즈가 언제나 그래왔듯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역시 당대의 화두와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흔적들이 보인다. 다양한 피부색과 체형을 지닌 여성 배역들에게 가능한 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려 노력하고, 성적 지향에 대한 고민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전쟁에 대해, 다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진영 사이의 교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시즌4 들어서 <스타트렉: 디스커버리>는 상실에 주목한다. 모종의 이유로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겪은 디스커버리호의 승무원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석하고 적응하려 애쓰고 있다. 그들이 겪은 상실은 너무나 거대해 맡은 바 직무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다. 선원들이 택한 해법은 흥미롭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디스커버리호의 의사이자 심리 상담사인 컬버 소령을 찾아가 자신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칵테일 바에 앉아 서로에게 조언을 구한다. 함교 멤버들은 카메라 앞에서 과거와 현재를 털어놓으며 자신이 외롭고 힘들어하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심지어 상담사인 컬버 소령조차 자신의 힘듦을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조금 놀란 연출 방식이었다. 통상적으로 이야기 매체는 사건을 통해 관계를 풀어낸다. 거대한 위기를 넘어서는 동안 우리의 주인공들은 협력하고 교감하며 하나가 된다. 하지만 <스타트렉: 디스커버리>는 반대의 순서를 취한다. 서로 대화하고 교감하여 하나가 된 후 협력해 위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교훈을 준다.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 등장인물들이 훨씬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기술적인 분석으로 들어가서. 작가들이 사건으로 관계를 풀어내는 이유는 그게 인물들이 협력하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똑같은 위기를 겪는 동안 그들에겐 하나의 공통분모가 생긴다. 휘말린 사건 속에 하나둘 감정을 던지다보면 어느새 서로를 공감하게 된다.
공감을 시작하기 위한 공통분모.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의 작가진은 이 자리에 사건 대신 ‘상실’을 집어넣었다. 디스커버리호의 선원들은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상실의 감정으로부터 차곡차곡 이해를 쌓아나간다. 이해를 바탕으로 협력해 하나가 된다. 상실에 관한 교감의 경험들은 디스커버리호가 미지의 외계 문명과 접촉 임무를 완수하는 데 결정적인 힌트가 된다.
누구나 상실감을 맛본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뜻하지 않은 이별을 경험한다. 소중한 물건을 실수로 망가뜨린다. 하다못해 내가 알던 세계가 더는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더 잘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후회하며 더는 그러한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음을 눈치채게 된다. 아프다. 상실의 경험은. 심지어 외계인들도 그렇게 느낀다.
각자의 정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면서도 의외로 비슷비슷한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것. 어릴 적 나는 그게 사람과 사람이 공감하는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살며 기쁜 일이 전혀 없던 시절은 있어도, 아프거나 슬프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까. 아마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아프다. 그 작디작은 공통점 하나가 당신과 나를 포개어 겹쳐주고 있다. 한없이 작은 일부지만 확고한 접점. 그 첫 번째 명제 위에 차곡차곡 언어를 쌓으며 가느다란 정신의 실을 더듬어가다보면 우리는 끝내 서로의 가장 깊은 비밀에마저 가닿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시즌4의 마지막에서, 은하계의 안전을 지키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디스커버리호의 선원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휴가를 떠난다. 혼란스러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해석하기 위해.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행위다. 누구에게나. 어쩌면 휴식마저도 우리 시대 <스타트렉> 시리즈가 치열하게 맞서 싸워야 할 당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