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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친근한 고스트 버스터즈

<고스트 버스터즈>

20세기 초 추리소설 작가 로널드 녹스는 추리소설을 쓸 때 규칙이 있다면서 10개의 규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에는 반전이랍시고 처음 우리가 탐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범인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만들면 안된다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규칙을 다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하나 있다. 바로 다섯 번째 항목, “중국 남자가 등장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이다.

이게 뭔 황당한 소리인가 싶은데, 그것은 당시 영미권 대중소설계에 퍼져 있던 해괴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 당시 작가들은 대중소설에 등장하는 중국인들은 마귀와 요괴와 통하며 괴상한 주술을 사용한다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녹스는 추리소설에서 “범인이 사실은 공중부양을 해서 도망쳤다”, “범인은 얼굴을 바꾸는 술법을 이용해서 경찰을 속였다”라는, 터무니없이 신비로운 기술이 등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명 높은 중국 남자 금지라는 규정이 추리소설에 꼭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영화를 보면 사람에 대한 여러 편견이 대놓고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흔했다. 흑인들은 게으르고 무식하다라고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고, 멕시코인들은 음흉한 범죄자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한동안 흑인이 주인공인 할리우드 주류 영화는 제작되지 못했고, 멕시코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연애하는 이야기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자에 대해서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상한 편견이 퍼져 있던 시기가 있었다. 가만 보면 이런 편견이 생기는 데는 사실 초창기 SF도 한몫했던 것 같다. 과학기술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가 SF인 만큼 SF물의 주인공은 예나 지금이나 과학자인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이나 <투명인간> 같은 초기 SF의 걸작을 보면 주인공 과학자가 맛이 간 경우가 많았다.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겠다는 목표에 사로잡혀 위험한 실험을 한다거나 세계 정복을 꿈꾸는 황당한 망상에 사로잡힌 과학자들 말이다. 초창기 SF가 등장하던 19세기는 과학자라는 말이 나온 지 얼마 안된 시기여서 아무래도 과학자를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이하고 이상한 인물로 꾸며야 눈에 뜨일 거라고 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이후 정말 지독하게도 많이 반복되었고 그러다 보니 긴 세월 동안 과학자들의 모습은 하얀색 실험복을 입고 이상한 콧수염을 기른 영감님이 보통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혼자 심취해 있다라는 식으로 굳어졌다. 심지어 과학자들 스스로도 이런 모습에 약간은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험악한 노동환경에서 처참한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월화수목금금금을 일하지만, 그렇게 죽자고 일을 해도 과학자들은 시키는 연구만 하면 즐겁게 지낼 거라는 이상한 환상도 가끔씩 서렸던 것 같다.

그러나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다수의 과학자들은 그냥 회사원인 연구원이다. 업무에 과학 지식을 좀 많이 사용하며 일할 뿐이지 그냥 회사원처럼 산다.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이상한 종족이 아니다. 더군다나 경제의 많은 부분을 첨단 기술 산업에 의존하는 한국에서는 영업이나 기획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과학기술을 가까이하며 일하기 마련이다. 즉 과학자라고 해봐야 평범한 한국인에서 별로 거리가 멀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그런 만큼 과학자가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해도 보통 사람과 다른 괴상한 성격을 강조하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심리를 활용하는 쪽에 중심을 두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경희 작가도 전에 말했듯이, 그 공감을 바탕에 두고 과학자로서 약간의 개성을 양념으로 뿌리면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진다.

그런 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를 고르라면 <고스트 버스터즈>(1984)도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기본 틀은 전문가들이 유령을 퇴치하는 사업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령 퇴치 전문가들이 무슨 기가 맑은 사람들이라거나 대대로 귀신 쫓는 일을 하는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고스트 버스터즈’는 유령에 관한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독특해진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정신을 집중하거나 주문을 외어 유령을 퇴치하는 것이 아니라 최신 전자 장비를 개발하거나 활용하려 고민하고 번쩍거리는 고압전류를 이용해 유령과 싸운다.

희극영화로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우스꽝스럽게 과장되어 있다. 옛 SF 속 과학자들처럼 엄청나게 복잡한 긴긴 전문 용어들을 리듬감 있게 읊어대며 주고받는 장면도 중요하게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기본 줄기는 유령 퇴치 회사라는 스타트업을 차린 친구들의 고생담이다. 장사가 안돼 고민하고 그러다 일이 좀 풀리기 시작하니 광고를 해보려고도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느 회사, 보통 가게의 사연과 마찬가지로 펼쳐진다. 그 친숙한 이야기와 유령이라는 신비한 소재의 연결 고리를 과학과 과학자가 채우고 있다.

이렇게 친근하고 평범한 사람인 과학자를 SF에 등장시키는 것은 SF를 쉽게 만들고자 할 때 추천할 만한 수법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1980년대 할리우드에서만 통할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궁중에는 악귀를 쫓기 위해 총이나 대포를 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광해군이 이런 일에 빠져 있어서 20명쯤 되는 부대를 조직해 방포사라는 총 쏘며 귀신 쫓는 행사를 벌였다는데, 이때 화포장, 즉 총과 대포 만드는 장인들에게 이 일을 시켰다고 한다. 기술인이 자기가 만든 총을 들고 유령과 싸운다는 점에서 조선의 고스트 버스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귀신 이야기라면 딱 질색인 겁쟁이지만 화약 다루는 기술은 최고인 어느 기술에 밝은 조선 장인이 있었는데 임금님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신 쫓는 부대 대원이 되어 매일 밤 덜덜 떨며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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