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어디서나, 한꺼번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역동적인 세계관을 이보다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영화 소개에 앞서 “가족 드라마용, 사이언스 픽션용, 철학용 답이 각각 따로 있다”는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의 말이 그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디오 인터뷰를 통해 두 감독이 추동한 가상세계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엮어 또 다른 우주를 열어봤다.

다니엘 쉐이너트, 다니엘 콴(왼쪽부터).

관객에게 ‘멀티버스’(다중우주)가 더이상 낯선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우주에 있는 ‘나’의 장기와 힘을 빌리기 위해 버스점프(verse-jump)를 해야 한다는 설정이 참신하다.

다니엘 콴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의 장점 중 하나는 우연히 발견한 사소한 것을 통해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하루는 언어학자가 나와 양상실재론에 관해 설명하는 TV다큐멘터리를 봤다.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치솟아 검색해보니 나와 대응 관계에 있는 또 다른 ‘나’들이 여러 우주에 걸쳐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세계의 중심에 현재의 내가 있고, 그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지금의 나와 크게 달라진다고 했다. 이 개념을 접하자마자 완전히 매료됐다. 지금의 내가 이상행동을 하면 외부 세계에서 나를 끌어당겨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는 상상을 조금씩 덧붙였다. 엉뚱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이건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다. (웃음)

다니엘 쉐이너트 다니엘 콴이 이 이야기를 처음 설명할 때만 해도 대부분이 액션영화의 요소였다. 서로 다른 우주에 연결된 개념을 알려주기 위해 거품 그림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플롯이 제대로 된 구성을 갖추기까지 2년 정도 걸렸다.

동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작품이 늘고 있지만,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 인물 대부분이 백인인 경우가 여전히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시아인 배우의 비중이 높고, 백인도 젊고 돈 많은 전형적인 이미지로 그리지 않았다.

다니엘 콴 이 영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꼭 만들고 싶었다. 나와 우리 가족이 마주한 역사를 탐색하고 싶었으니까. 사실 시나리오를 쓸 때까지만 해도 미국 사람들은 아시아인이 주인공인 작품을 어색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과 <기생충>(2019)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미국 내 많은 아시아인이 큰 용기를 얻었다. 나도 대학 시절부터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의 영화 제작자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국 내에서도 체감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언제나 반갑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영화 작업을 훨씬 더 수월하게, 그리고 성공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주기 때문이다.

다니엘 쉐이너트 그런데 아시아 배우를 계속 캐스팅한 건 우연이다. 일부러 아시아인을 뽑으려 한 건 아니다. 재능 있고 신체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모두 아시아 배우였다.

영화에서 격투 신이 시종일관 이어진다. 그런데 유혈이 낭자하거나, 시체가 보이거나, 총을 쏘는 장면은 전무하다.

다니엘 콴 간단하다.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게 싫다. (웃음) 역동적인 액션영화는 좋지만 폭력은 싫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보여주기보다 누군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 듯한, 혹은 어떤 성질이 변하는 듯한 장면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또 엔딩에 다다라서는 주인공의 사투를 총이 아니라 다정함으로 무장한 서사적 액션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이건 우리에게 큰 도전이고 계획한 대로 그려질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잘 이뤄낸다면 무척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한국의 요즘 풍경과 연계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요즘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에 가면 대기실이 Z세대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실제로 2021년에 우울증 진단을 받은 20대 환자 수가 2017년 대비 127.1% 급증했다. 영화는 실존주의와 허무주의를 동시에 다루며 삶의 이유를 계속 관철하는데, 무망한 기분에 깊이 빠져드는 이들이 늘어나는 현실에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다니엘 콴 나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결국 불안을 다루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불안이 곳곳에 만연하다. 일상에서 너무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충돌하고, 신경을 거스르는 부정적 소식이 넘친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 나타나는 삶의 허무함과 공허감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포기하지 않는 애정으로 채워진다. 나는 이 과정이야말로 사람들이 사회를 구축해온 방식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불안을 잠재우고 마음을 돌보는 좋은 방법은 그저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 있기에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빌런인 조부가 자신과 같은 걸 볼 수 있는 에블린을 오랫동안 찾아 나섰던 것처럼. 이것만으로도 마음 상태가 훨씬 나아진다.

다니엘 쉐이너트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를 조금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영화를 통해 젊은 세대가 자기 마음에 완전히 뛰어들 수 있으면 좋겠다.

특히 딸 조이와 엄마 에블린의 관계가 현실적으로 그려졌다. 한국에서는 첫딸을 ‘K-장녀’라 부르기도 하는데, 가족들이 장녀인 자신에게 요구하는 전통적 규범과 자기가 진정 원하는 자유로운 나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존재라는 뜻이다.

다니엘 콴 비슷한 역동적 변화가 미국 내 중국인 가족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의 의지를 잘 따르고 존중하지만 이민 과정을 거치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엉망이 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여성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착한 딸이 될 것을 요구받는 동시에 미국 여성으로 자라야 한다는 과한 요구에 부담을 느낀다. 우리 영화에서 조이를 안정되고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이상하고 창조적이고 은근히 엉뚱한 아시아계 미국 여성으로 그린 이유이기도 하다.

다니엘 쉐이너트 우리는 인터넷 문화가 세대 차이를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키우는지 자주 이야기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인터넷과 함께 자라서 그에 아주 익숙하지만 부모 세대는 다르다. 예를 들어 에블린은 시공간이 빠르게 바뀌거나 이곳저곳을 옮겨다녀야 하는 세계관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통해 인터넷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모 세대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에블린이 어려워하면 할수록 우리는 부모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들의 혼란을 지켜보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영화의 주인공이 젊은 세대가 아니라 부모 세대인 이유다. 관객이 영화를 보며 자신과 부모 사이의 문제를 직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상대방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만큼 갈등을 치유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그조차 어렵다면 ‘우리 부모님은 왜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거지?’라는 짧은 질문으로 시작해도 좋다.

영화는 한권의 철학책처럼 많은 심오한 주제를 다루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다니엘 콴 영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랑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철학자이자 작가인 다니엘 슈마흐텐베르거는 사랑이란 그 대상을 완전히 아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의 멀티버스에도 아는 것을 힘으로 쓰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조이가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응집한다면, 에블린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것을 활용한다. 에블린이 계단에 올라 모두와 맞서 싸울 때, 결국 그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전투에서 이기지 않나. 사랑은 그런 거다. 모든 것을 초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