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오늘은 SF
[곽재식의 오늘은 SF] 너티 프로페서 2022

1963년작 할리우드영화 <너티 프로페서>(The Nutty Professor)의 주인공은 답답한 과학자다. 말주변도 없고 사회성도 떨어지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선 이야기도 잘 못하고 근육도 힘도 없는 못난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데, 그러다 자신의 주특기인 화학을 이용해 놀라운 과학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가 만드는 약을 마시면 성격과 행동거지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나이처럼 변한다. 이후 시간이 갈수록, 그는 변신한 자신과 원래 모습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즉 <너티 프로페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코미디판이다. 지킬 박사가 변신한 하이드는 폭력을 휘두르며 범죄를 저지르는 무서운 인물이지만 이 영화 속 주인공, 버디 러브는 1960년대 초 유행에 맞추어 온갖 멋있는 척은 다 하고 돌아다니며 수많은 여성들을 반하게 만드는 남자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 제리 루이스의 대표작으로 꼽힐 만큼 이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했다. 영원한 걸작으로 취급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겠으나 미국에서는 꽤 널리 알려진 영화라, 1990년대 후반에 에디 머피가 주연을 맡은 리메이크판까지 나왔다.

그런 만큼 챙겨 볼만한 재미 있는 장면이 꽤 있다. 제리 루이스는 일찌감치 넘어지고 자빠지고 일부러 멍청한 말투로 말하고 웃긴 표정을 과장되게 짓는 방식의 구식 코미디에 지나치게 치중한다는 평을 받았던 배우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혼자 과장된 연기로 극심한 얼뜨기인 원래의 주인공과 극심한 멋쟁이인 변신 상태를 대조해서 보여주는 데 도전했다. 그렇게 해서 확실한 구경거리를 만들어냈다. 특히 재미있는 쪽은 제리 루이스의 주특기였던 멍청한 모습이 아니라 반대로 멋쟁이랍시고 변신한 상태다. 말이 멋쟁이지 당시 최신 유행을 어림없이 과장해서 우스꽝스럽게 펼친 인물이다. 그래서 멋쟁이쪽도 황당한 인물로 보이긴 매한가지다. 멍청한 연기의 달인인 배우가 방금 전까지 굉장한 멍청함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관객은 뻔히 아는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변신했다면서 최신 유행 말투, 최신 유행 머리 모양, 최신 유행 옷차림을 온통 뽐내는 장면이 연달아 나온다. 그런 모습은 잘난 척하는 세태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되면서 재미를 더한다. 자신감이 과도하여 아무에게나 날카로운 일침이랍시고 이상한 말을 툭툭 던지고, 항상 담배를 물고 다니며 술을 달고 사는 게 운치 있는 모습인 줄 아는 사람이 이 영화 속 멋쟁이인데, 주위에선 그런 모습이 멋지다고 환호한다. 그 와중에 몇몇 장면은 진심으로 멋져 보이는 것처럼 연출되는데, 조롱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다 싶은 대목도 슬쩍슬쩍 끼어 있다. 그게 영화에 감칠맛을 더한다. 이 영화에서 제리 루이스가 'The Old Black Magic'나 'We’ ve Got a World That Swings'를 부르는 장면은 상당히 그럴싸하게 연출됐다. 제리 루이스를 위대한 가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노래 부르는 장면들이 흥겨운 금요일 밤 느낌, 여유 있는 여흥 느낌, 신나는 파티 느낌에 어울려 썩 보기 좋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영화도 SF로 분류되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미래 세계나 우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외계인도 로봇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기초가 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초창기 SF의 고전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고, 화학을 하는 과학자의 삶과 그 과학자의 신기한 발명품을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 분명히 과학과 얽혀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SF로 분류한다. 특히 1960년대 초는 화학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온갖 새로운 옷감, 세제, 접착제 등이 등장하던 시대다. 화학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첨단 기술의 대표였던 시절이었다는 뜻이다. 화학자가 놀라운 발명품을 개발해 소동을 일으키는 코미디라면 더욱 쉽게 SF로 받아들일 만했다. 나는 이렇게 SF의 범위를 넉넉할 만큼 넓게 보는 편이 SF를 만들고 즐기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즐길 만한 헐렁한 이야기에 적당히 SF를 살짝 끼얹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독특해지고 생동감이 살아나는 일은 많다.

<너티 프로페서>를 한번 2020년대로 옮겨 보는 상상을 해보자. 요즘의 최신 유행 과학 분야는 인공지능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개발자를 주인공으로 삼아볼 만하다. 나는 너무 많이 봐서 질리는 인물 유형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그 개발자가 숫기 없고 인기 없고 사람을 잘 대하지 못하고 맨날 못생긴 옷만 입는 답답한 주인공이라고 해보자. 그는 자기 인생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개발한 초고성능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멋있어 보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러고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인공지능의 충고를 따라하면, 엄청나게 멋진 행동, 멋진 대사를 하며 살 수 있게 된다. 마침 제리 루이스가 부르던 “블랙 매직” 어쩌고 하는 노래 가사는 2020년대 K팝 노래에도 썩 잘 어울리게 들린다. 평소에는 재미없는 프로그래머이지만, 인공지능의 말을 듣기 시작하면 K팝 아이돌처럼 변신하는 이야기가 쉽게 떠오른다. 그래서 주인공은 결국 평소 짝사랑하던 사람과도 잘 엮인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진정한 나 자신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어쩌고 저쩌고. 마지막 반전을 하나 만들어 덧붙이자면, 알고 보니 그 짝사랑하던 상대가 사실은 더 발빠른 인공지능 프로그램 전문가라서 애초에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충고에 따라 주인공을 홀렸던 것이라고 해볼 수도 있겠다. 이 정도만 해도 요즘 유행하는 SF다운 느낌이 물씬 난다고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비슷한 내용의 SF를 이미 몇편 본 것 같아서 이 정도로는 싱겁다는 생각까지 든다. 반대로 보면, 이것은 우리가 진짜 SF다운 SF라고 생각하는 것과 60년 전의 가벼운 코미디영화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증거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