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프랜 크랜즈의 연출 데뷔작인 <매스>는 제37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포워드 부문에서 상영되고 관객상을 수상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한정된 공간 속 네 인물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간소한 조건의 제한적인 성질을 이용해 역으로 잠재된 형식미와 드라마를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비슷한 설정을 공유하는 <대학살의 신> <더 파티> 등의 사례와 궤를 같이한다. 다만 <매스>는 같은 공간에서도 교류하지 않는 숏들로 무거운 질문을 이행하는 한편, 방대한 대사를 통해 극적 아이러니를 집요하게 실어나른다. 영화의 러닝타임인 110분은 극중 인물들이 만나고 대화하고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보존하는 시간으로 현장감 있게 기능한다. 그리하여 <매스>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돌연하고도 우발적인 순간들마저 거대한 흐름에 함께 배치되는 평등한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라는 덩어리로 존재하는 집단(mass)과 개인(들)의 이야기가 동시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집사인 주디(브리다 울)가 교회 건물에 딸린 방에서 무언가 준비하는 과정을 꽤 길게 담는다. 장을 봐온 주디는 교회에서 활동하는 청년 앤서니와 탁자를 옮기고 실내를 정돈한다. 아마 곧 어떤 모임이 있을 것 같다. 켄드라(미셸. N. 카터)라는 여성이 도착해 예민한 눈으로 방의 이모저모를 확인하고 주디가 어색한 표정으로 켄드라에게 ‘그 일’에 관해 물어볼 때까지도 관객은 이들이 대체 무엇을 대비하고 있는지 설명받지 못한다. 공개된 시놉시스는 영화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두 부부”에 관한 이야기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매스>는 서사의 씨앗을 들춰내기 위해 뿌리부터 잡고 지레 힘주기보다 주변을 이루는 토양부터 조심히 살피고 매만진다. 예컨대 주디와 켄드라의 대화에서 짐작하기 어려웠던 모임의 정체는 두 부부가 등장하고 그들이 방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 위상이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정체가 오인될 만한 여지를 보인다. 어색한 인사치레 후 각자 자식들의 어릴 적 사진을 공유하는 대목은 마치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아이들의 부모가 자식을 ‘교환’하기 전 모의 중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매스>의 소재는 주로 가족(또는 공동체)이 연루된 문제를 윤리적 심급과 결부시키는 다르덴 형제 또는 첨예한 갈등에서 야기되는 서스펜스에 관객을 동참시키는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영화를 설핏 연상하게 만들면서도 스토리텔링에 있어 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말의 범람, 침묵의 시간
영화는 연령대도 계급도 사뭇 달라 보이는 두 부부가 엮이게 된 연유를 밝히길 오래 지연하면서 모종의 미스터리를 형성한다. 대체로 극에서 미스터리란 관객에게 특정한 정보값이 누락될 때 발생된다. 많은 시나리오 작법서가 일러주듯 극중 인물이 관객보다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할 때 양자간 지각의 낙차를 드러내는 것이 미스터리의 지침이다. 이 원칙에 잠시 기대자면 <매스>는 확실히 미스터리를 주요하게 작동시키는 드라마다. 영화는 두 부부가 겪은 사건과 그로 인한 결과에서 내내 관객을 소외시키면서 전개된다. 그런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과도할 만큼 많은 대사를 통해 다량의 정보를 누설시키는 데도 열심이다. 인물들은 쉼 없이 많은 전사(前史)를 주고받으며 토론과 논박의 시간을 갖는다. 무엇보다 영화는 이미지를 통해 이전을 거스르거나 회고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현재의 시간으로, 그리하여 같은 방에서만 80분 가까이 대사를 쏟아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제껏 열거된 많은 사실 속에서 주목할 내용이 무엇인지 여전히 확정하기 쉽지 않도록 한다.
<매스>가 정보를 서서히 공개하는 방식은 꽤 주효하다. 간략한 줄거리에서 두 부부가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영화를 보더라도, 중반부의 노골적인 대사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우리는 이들 중 어느 편이 피해자의 유족이며 가해자의 유족인지 확증할 수 없다. 물론 린다(앤 도드)가 상대편 부부의 아내인 게일(마사 플림프턴)을 만나자마자 선물로 꽃을 건네는 장면이나, 대화 도중 눈물 흘리는 린다를 쳐다보던 게일이 휴지를 냉담하게 전달하는 장면에서 두 부부의 관계성을 예상해볼 수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주석이 달리지 않았기에 관객은 이 모든 감정의 파동이 어떤 흐름에 자리하는지 완벽히 상상하지 못한다. 더구나 이들이 대화 초반부, 사건과 연루된 자식들이 아닌 다른 형제자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 또한 전체적인 전말에 혼란을 배가한다. 결국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은 여러 질문과 마주하는데, 이 사정은 가해자 입장의 부부 또한 결국 아이를 잃었음이 확인될 때 더 복잡해진다. 끊임없이 던져지는 대사들은 매 국면 새로운 의심을 쏘아 올린다. 1) 과연 어느 쪽이 피해자의 유족이고 가해자의 유족인지, 2) 피해자는 왜/어떻게 죽었는지, 3) 게다가 가해자 또한 왜/어떻게 죽은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이 가지를 친다.
이따금 휴지(休止)가 있긴 하나 대체로 풍성한 대화를 이어가는 <매스>의 구술은 사건의 핵심에 있지 않은 이들이 모여 자신들이 관여하지 않은 사태를 분석하는 일의 곤란함을 어렵사리 체화한다. 그리하여 영화에서 (심지어 실화에 기반한) 어려운 사건을 다룰 때, 이를 영화에 기대되던 시각화라는 오래된 요청을 단념하고 평면적인 화면을 넘나드는 ‘말’로 풀어야 할 때 맞닥뜨리는 어려움은 극중 부부들이 자신들이 부재한 사이 발생한 일을 되살려 발화하는 상황에 당면한 곤궁과 평행하게 놓고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이내 침묵이 끼어들 때야말로 대화의 충만함에 방점을 찍는 순간임을 역설한다.
네개의 의자와 한개의 탁자
<매스>의 인물들은 각자 의자에 앉은 채 하나의 탁자를 둘러싼 형태로 대면한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교회 예배당의 장의자가 아니라, 각기 분리된 개별 의자에 앉는 것이다(흥미롭게도 초반부에 주디는 탁자를 중심으로 모든 면에 동일한 간격을 두고 각각 한개의 의자를 배치하는데, 방을 살펴보던 켄드라가 의자를 한쪽에 두개씩 재배열한다. 이 간결한 수정은 아직 단절적인 이 모임의 성격을 또렷이 지시한다). 네개의 의자와 한개의 탁자라는 소품은 인물들의 분기하면서도 통합되는 양가적 입장을 모두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인물들은 한 부부일지라도 입이 모아지지 않을 때가 있어 각자 명백한 개인으로서 자리하는 한편, 한쪽은 피해자의 유족이며 다른 한쪽은 가해자의 유족이라는 점에서 2 대 2로 구분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은 동일한 사건에서 파생된 처지이자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인한 슬픔의 자국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단일한 집단이다. <매스>는 나와 타자, 부분과 전체를 오가는 이중적인 자리를 추궁한다. 이 끝없는 고통을 어떻게 소진해야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오로지 나 또는 협소한 의미의 우리에게로만 수렴되는 질문이 아니라 같은 사건에 부득이하게 몸을 담은 상대편에게도 적용된다. 영화는 이제껏 적으로 여겼던 ‘그들’의 고민이 내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또 다른 방식의 유대가 있다고 본다.
그 점에서 장르에 포섭시키자면 <매스>는 가족 없는 가족영화다. 모성의 강조와 가부장을 향한 비호로 정상가족을 표방하던 영화들이 점차 탈락되고 대안적인 가족의 형태와 유지 방식을 그리는 작품들이 늘고 있지만, 그렇다고 <매스>가 작금의 조류에서 괄목할 만큼 가족을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영화는 아니다. 차라리 영화가 제안하는 바는 가족이 사라진 자리에서 어떻게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정감을 위임받을 수 있느냐는 고민이다. 혹은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이 잔혹한 살인자라는 고통스러운 역설이 부모의 심장을 쥐고 뒤흔들 때, 과연 양자를 모두 애도하는 역설이 가능한가, 라는 극단적인 딜레마를 숙고해보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린다의 사례는 콜럼바인 총기난사사건 가해자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드가 쓴 회고록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문제와도 공명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가족 아닌 가족, 공동체로서의 전체를 향한 질문으로 나아가는데, 이는 결국 파편적인 개인들에 대한 이해와도 무관하지 않다.
<매스>에서 사물이 이동하는 방향, 그리고 인물들의 자리가 바뀌는 지점은 또 한번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예컨대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잠깐 치워둔 어떤 선물은 다시금 옮겨와 나의 여정에 동반하게 된다. 무엇보다 <매스>는 맞은편에 앉은 이의 자리에 우연히 앉음으로써 각자의 위치를 가늠하고 결국 새로운 곳으로 함께 이동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타인의 자리에 착석하는 일은 영화의 고집스러운 숏-리버스숏이라는 구도를 그려보(는 동시에 뭉개)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 점에서 본편의 시종 고정된 카메라가 언제를 기점으로 흔들리는지, 상대방의 어깨를 담지 않던 화면이 어떻게 점차 그 거리를 좁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 후반부에는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이는 영화의 맨 처음 주디가 교회에 들어설 때 화면 왼편에서 중년 남성에게 레슨을 받던 아이가 서툴게 연주하던 피아노 선율과 같다. “주 믿는 형제들”(Blest Be the Tie That Binds)을 부르는 이 소리는 아이의 어색한 타건, 남성의 원숙한 연주를 이어받아 콰이어의 조화로운 미사곡(mass)이 되어 돌아온다. 제각각이 결합해 이루는 하나의 목소리를 긍정하고 위무하는 하모니다.
네 배우들
조화로운 앙상블을 선보이는 네 배우의 호연은 <매스>가 가장 자랑할 만한 부분이다. 네 인물의 각기 다른 특성은 캐릭터 연구에도 유용한 레퍼런스가 될 것 같다. 린다 역할의 앤 도드는 오랫동안 영화계에 몸담았지만 주로 단역을 도맡아오던 중 영화 <유전>과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에서 주목받았으며, <매스>를 통해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린다의 남편인 리처드 역의 리드 버니는 국내 관객에게는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하원의원 도널드 블라이스로 친숙할 것이다. <매스>에서 가장 냉철한 역할로, 비극을 겪은 부모에 대한 전형적 인상을 비껴간 그의 연기는 일찌감치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를 오가며 연극계에서 활약해온 데서 비롯한 듯하다. 2016년 토니상을 수상한 연극 <더 휴먼스>의 주역이기도 하니 말이다. 한편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드레이코 말포이의 아버지 루시우스 말포이로 유명한 제이슨 아이작스가 피해자의 아버지 제이로 분했다. 영국 배우지만 예의 그 딱딱한 악센트를 지우고 나타난 그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절절하게 끌어올린다. 무엇보다 마사 플림프턴은 많은 관객에게 가장 놀랍고도 반가운 얼굴일 터. <허공에의 질주>의 로나가 어느덧 모진 세파와 삶의 격랑에서 가쁘게 헤엄치는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