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치던 방> 이후 오랜만에 만난 이완민 감독은 몇해 전과 마찬가지로 우선 가방에서 노트부터 꺼냈다. 찬찬히 빈 페이지가 있는 곳까지 종이를 넘긴 감독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갈 때마다 자잘한 글씨와 기호들, 그리고 자유로운 곡선으로 공백을 채워나갔다. “쓰고 그리면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가 이번 영화 <사랑의 고고학>에서 만들어낸 인물 영실(옥자연)도 어쩌면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다. 끈기있는 제토의 과정을 거쳐 땅에 희미하게 새겨진 유구선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작되는 발굴의 예술은 영화 속 인물이 자기 마음을 되찾는 순간과 중첩된다. 그렇게 이완민 감독은 끈기 있고 대담하게, 시간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감옥 바깥으로 발을 딛는다.
- 6년만에 두번째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 얼마 전부터 서점에서 파트타임 근무 중이다. 계산하고 진열하는 단순 업무인데 내게는 꽤 재미있다. 책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 <누에치던 방>은 10대 시절의 기억에 얽힌 영화였고 <사랑의 고고학>은 마흔살이 된 여자가 지난날의 사랑을 돌아보는 과정이다. 어떤 단서로부터 이번 이야기를 집필했나.
= 작업에 들어갈 때 보통 그 시기에 내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게 된다. 말하자면 <누에치던 방>은 청소년기가 남긴 흔적을, <사랑의 고고학>은 청년기를 지나면서 나를 가장 신경쓰이게 한 것들을 생각하며 썼다.
- 영화는 고고학자인 영실이 거쳐온 어떤 연애 관계를 들여다본다. 왜 고고학인가.
= 과거의 연애와 관계, 현재의 상태, 그리고 미래에 바라고 있는 관계 같은 것들이 층층이 놓였을 때 그것 자체로 고고학적이라고 느꼈다. 그런 맥락에서 제목을 이라고 연상해보았는데, 그런 제목을 가진 영화의 주인공이 실제로 고고학자이면 좀 코믹할 것 같았다. 그게 출발이었고 나중엔 이런 질문도 뒤따랐다. '제목이 <사랑의 고고학>인데 정작 이 영화 어디에도 사랑이 없다면 그건 어떨까?'
- 박물관, 발굴 작업장 등 학예사와 연구원들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타자화하지 않으면서도 소재의 매력을 지켜냈다. 취재 과정은 어떤 경로를 거쳤나.
= 영화를 하지 않았다면 고고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한번은 익산의 미륵사지에 방문했는데 우연히 발굴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 갓 출토되어 비닐에 싸인 유물을 보면서, 유물 자신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로 땅 위에 드러나버린 것이 당황스럽지는 않을까, 그런 마음도 들더라. 프로덕션이 시작된 이후로는 프로듀서의 소개로 경상북도 상주의 현장에 내려가서 3주 정도 작업장의 어르신들과 부대끼며 지냈다. 그 때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장면이 많다. 흙을 골라낸 다음 유구선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든가, 능선을 따라 위로 걸어올라가는 연구원들의 뒷모습 같은 것들은 직접 목격한 이미지들이다.
- 과거의 연인 인식(기윤)과 보낸 8년의 시간은 여전히 영실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현재의 영실이 혼자로도 온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며 외려 안도하는 것 같다.
= 나는 자주 혼자 있고,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상시적인 혼자의 상태에 놓여있다는 점을 자주 생각한다. 그러다 우리가 더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었을 때 예기치 않게 어떤 폭력적인 상태에 놓일 수 있음을 그리고 싶었다. 나쁜 관계 안에서 나는 더 강력하게 저항하는 편이 좋았을까? 아니면 나의 성장과 변화에 집중해야 했을까? 그런 고민의 줄기를 따라가며 만든 영화다.
- 연애에서 작동하는 젠더 권력의 불합리한 일면을 보여준다. 영실이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영식의 분노를 사는 장면, 헤픈 여자라고 비난받는 장면 등이 서술된다.
= 영화 속 영실의 대사로도 쓴 것처럼, 짧은 치마 한 번 입는 일로 온갖 고민과 검열을 했던 청년 시절의 내가 싫었다. 분노라고도 할 수 있을 거다. 어느날은 문득 ‘여자라는 이유로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하다니!’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식이었다. 내게 어떤 숨막힘이 있었고 그 순간들을 모아서 우선 어떻게든 1차적으로 표현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성들이 구조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를 건드리고 싶은 한편 혹시 나 스스로 만든 감옥은 아닌지 혼란도 있었다.
- 영실을 회유하는 인식의 말들은 요즘 자주 회자되는 용어인 가스라이팅을 떠올리게 한다. 몇몇 대사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지리멸렬해서 웃음이 터질 정도였는데, 시나리오의 디테일을 조각한 방식, 배우에게 애드리브를 허용한 정도가 궁금하다.
= 처음부터 어떤 답과 방향성을 갖고서 주제에 설득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저 상황에 충실한 채로 대사를 쓸 수 있었다. 직간접적인 내 경험과 관찰을 있는 그대로 녹여내는 것을 우선시했다. 배우의 애드리브는 거의 없었고, 다만 촬영 현장에 가기 전에 배우들과 사전 미팅을 충분히 가진 편이다.
- 인식을 견뎌보려 하는 영실의 대처 역시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다. 솔직히 말해 관객을 안심시키는 유능한 유형의 주인공은 아니다. (웃음)
= 답답하지. (웃음) 고지식한 사람, 일종의 원칙주의자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런 인물이 자기 특성을 어떤 극단까지 밀고 갔을 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인식과 약속한 내용을 끝까지 곧이곧대로 지키려고 노력할 때 그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인물형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 영실을 연기한 옥자연에게서 이 배우가 그동안 보여준 여러 레이어 중 가장 연약한 층을 본 것만 같다.
= 안으로 굉장히 넓고 깊이 패여있는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혼자 땅 파고 있는 고고학자와 잘 어울리겠다는 확신이 섰고, 배우도 시나리오를 보고 금방 마음을 결정해주었다.
- <누에치던 방>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주관성에 의지한 시간 관념이 영화의 인상을 결정한다. 내러티브의 큰 밑그림을 우선 그려두고 시작한 서사일까.
= 일단 길이는 좀 줄여볼까도 생각 중이다. (웃음) 구상 단계에서 길이나 구조를 먼저 세우지는 않았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초반의 내레이션이었다. 영실이 우도라는 새 남자를 마음에 품게 되면서, 그 남자도 과거의 인식처럼 자신을 대하지는 않을지 스스로 질문할 때 “내게도 행운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속엣말이 나온다. 이 순간에서부터 영화의 모든 나머지가 파생된 것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입에 넣었을 때 기억이 확 펼쳐지는 것처럼 내게는 어떤 중요한 모먼트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