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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JU IFF #4호 [인터뷰] '우.천.사' 한제이 감독, 불확실하기에 깊어지는 사랑의 마음
이자연 사진 백종헌 2023-04-30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한제이 감독

때는 1999년, 지구 종말론이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불안의 시대. 태권도 국가대표전을 준비하는 주영(박수연)과 소년원 학교 출신인 예지(이유미)는 ‘가정 프로젝트'라는 청소년 사회화 프로그램을 통해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된다. ‘담쟁이' 넝쿨처럼 서로를 기대어 자라나는 두 소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종말의 시대에서 유일하게 다음을 약속하고 사랑을 속삭인다. 사랑은 무엇으로 존재하고 증명되는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야 답할 수 있는 질문 앞에서, 한제이 감독에게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이하 <우천사>)>를 통해 구현하고 싶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물었다.

- <우천사>는 태권 소녀와 소년원 학교 출신 소녀의 만남과 사랑을 다룬다. 처음 시나리오 작업을 어떻게 진행했나.

=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전작 <담쟁이>가 상영되던 시기에 원작 작가님으로부터 연출을 부탁받았다. 태권도 선수와 소년원 출신의 아이가 만난다는 주요 골자는 그대로지만 원작은 더 어둡고 폭력적 묘사가 많았다. 그래서 기본 주제 의식은 지키되 사랑 이야기가 70% 더 도드라지도록 각색했다.

- 1999년을 배경으로 둔 만큼 당대를 나타내는 소품들이 눈에 띈다. 90년대 특유의 현수막 글자체부터 뚱뚱한 컴퓨터 모니터, 스칼렛 컬러의 몰딩까지. 미술 구현 과정은 어땠나.

= 예산이 많지 않아서 최소 주영의 집과 성희의 집만큼은 1999년의 풍경을 반영하려 했다. 붉은 몰딩도 우리가 새롭게 도배한 것이다. 다른 데 돈을 줄이는 대신 미술 표현을 더 강조했다. 제작사에도 ‘미술을 위해서라면 회차를 줄이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소품은 태권도 대회에서 나왔던 호구다. 머리에 쓰는 보호 장구인데 옛날 버전을 구하기가 어려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 시합장의 매트도 그 당시 쓰던 것을 찾아서 깔았다.

- 장면에 맞춰 나오는 노래들은 어떻게 선정했나. 수연이 예지에게 반한 노래방 장면에서 자우림의 <애인발견>이, 여행을 떠날 때에는 신화의 <으쌰으쌰>가, 또 천국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고호경의 <처음이었어요>가 흘러나온다.

= 노래 가사 자체가 시나리오 맥락과 일맥상통하길 바랐다. <애인발견>의 경우 ‘바보 같다 생각했어 널 처음 봤을 때'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주영과 예지의 관계사를 보여주기도 하고, 끼 부리는 예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마지막 도장을 찍어준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었어요>는 사실 가편집 단계에 김광석 노래를 깔아두었다. 그런데 김사월 음악감독이 여성의 목소리로 첫사랑의 설렘을 표현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한번 맞춰보니 정말 잘 어울리더라. 그렇게 최종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됐다.

- 아티스트 김사월과는 <담쟁이>부터 음악감독으로서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우천사>까지 함께 하게 되었나.

= 감독은 스탭과의 소통 방식을 따로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김사월 음악감독과는 합이 잘 맞았다. 뭐랄까, 텔레파시처럼 생각이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아이들이 납치된 모텔 신은 작업 전부터 어려웠는데, 감사하게도 내가 연출하고 싶은 바를 음악에 자연스레 녹여주었다.

- 영화는 십대 청소년의 퀴어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자신을 알아가는 10대와 자기정체성, 이 두 키워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이 사이에서 무엇을 포착하고 싶었나.

= 주인공을 고등학생으로 설정한 가장 큰 이유는 주영에게 예지가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보통 퀴어 영화에서 ‘여자를 사랑해도 괜찮은가?’ 하는 내적 갈등을 거치는데, <우천사>에서는 일부러 그런 과정을 빼버렸다. 첫사랑이야말로 그런 기준으로부터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들면 계산 없이 그냥 그 감정에 빠져버리고 말지 않나. 기준은 사회적 규범이나 여러 경험을 거칠수록 생겨나기 때문에 그냥 사랑하고 싶어하는, 순수한 본질에 집중하고 싶었다.

- 이유미, 박수연 배우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큰 몰입을 키운다. 두 배우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 이유미 배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한창 <우천사>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오징어 게임>이 공개됐다. 그리고 유미와 외형적으로나 연기적으로나 합이 가장 좋은 배우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박수연 배우다. 풍파를 거친 예지와 달리 떼도 쓰고 철없어 보여도 그게 밉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수연은 연기 속에서 사랑스러운 구석을 잘 보여준다. 주변 인물들에게 물어물어 직접 전화통화로 캐스팅을 했다. 다른 독립영화에서 눈여겨 봐왔는데 밝고 순수한 면을 부각시킨 작품이 없던 것 같아 그런 면을 많이 강조했다.

- 현재 패션 스타일로 각광 받는 Y2K는 사실 특정한 세대적 풍경이 담긴 언어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기 전 대두되었던 지구종말론과 각종 루머, 대중적 불안이 가득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예지와 주영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세기 말의 사랑을 다룬 영화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시대적 제한이 있어야 사랑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진짜 지구 종말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확실 속에서 영원을 말하고 사랑을 약속한다. 이런 배경 아래 예지와 주영이도 서로를 더 확신했을 것이다. 이 시기를 거쳐 본 모든 이들은 가장 막연한 시간 속에 다음을 약속해봤다. 향수처럼 그리운 그 때의 풍경을 드러내고자 했다.

- 하지만 무려 지구 종말을 앞두고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라는 말은 발칙하고도 나이브하게 들린다.

= 맞다. (웃음) 주영이는 그런 말도 한다. “내가 너 먹여 살릴게. 우리 나중에 커서 같이 살자.”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 나이이기 때문에, 또 첫사랑이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나이브함이다. 아마 주영이는 철저히 진심이었을 것이다.

- 예지 곁에는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혈연관계가 아닌 이모가 있다. 예지는 소년원 학교 출신이지만 그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게 무척 상징적이다. 태권도부 아이들에게도 주변 어른이 있지만 아무도 사고를 막지 못했잖나. <우천사>는 어른이 놓친 역할을 꼬집는다.

= 예지에게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있길 바랐다. 그래야 예지가 살 것 같았다. 이모의 전사는 사실 이렇다. 이모도 레즈비언으로서 예지의 어머니를 사랑했고, 가정폭력 피해자인 예지 어머니가 남편을 죽였을 때 죄를 다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마 예지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올바른 보호 속에 있지 않지만 나 또한 좋은 어른을 만나고 싶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런 어른이 되고 싶기도 하고. 그런 복합적인 마음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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