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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깊은 공포, 눈으로 말해요
2001-03-17

<가발제작자>

지난주 두독 드 비트의 <아버지와 딸>을 소개했는데, 이 작품과 함께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애니메이션 중에 인형 애니메이션

팬들이 주목할 만한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2000년 히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도 소개됐던 스테판 쉐플러의 <가발제작자>(Periwig-Maker)다. 상영시간 15분19초짜리

이 작품은 히로시마 페스티벌에서는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지만, 아카데미에서는 다른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후보에 올랐다.

<가발제작자>는 실사를 방불케 하는 유연한 동작이나 촌철살인의 유머를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의 마리오네트 인형극

전통에 기반을 둔 이 작품은 체코 인형 애니메이션의 대가 이리 트른카의 작품에 더 가깝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페스트의 공포가 뒤덮고 있던 중세의 런던. 매일 페스트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한 마을에 혼자 가발을 만들며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웃집에 사는 소녀가 페스트에 어머니를 잃고 홀로 남게 된 것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킬 것을

우려해 집에 갇혀 있게 된 소녀. 몰래 집을 탈출한 소녀는 겨울비가 오는 어느 날 가발 만드는 청년의 집에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페스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청년은 소녀의 눈길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시체를 나르는 수레에 소녀가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소녀가 묻힌 무덤을 몰래 찾는다. 그뒤 자신도 페스트에 걸린 것을 알게 된 그는 죽음을

앞두고 한 작업에 몰두하는데….

<가발제작자>의 매력은 삶에 대한 희망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짓눌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세의 암울한 정서를 기막히게 표현했다는 데

있다. 흔히 인형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많은 이들은 얼마나 사실적으로 움직이는가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감독 스테판 쉐플러는 과도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오히려 눈동자의 작은 움직임이나 인형들의 표정을 통해 가발제작자인 청년과 소녀간에 오가는 처연한 감정을 그리고 있다.

대사 한마디 없고, 두드러진 액션도 없지만, 마치 바로크 음악의 정교한 음률처럼 섬세하게 전개되는 인형들의 감정 표현은 숨이 막히게 한다.

쉐플러 감독은 페스트의 공포에 떠는 런던의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중간중간 실사 영상을 가미해 인형 세트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하지만 <가발제작자>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형 자체의 매력이다. 정교하게 제작된 이 인형들은 실사영화에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인간들보다 더 잘 나타내고 있다.

<가발제작자>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영국의 ‘매키넌 앤 사운더즈’(Mackinnon & Saunders)사의 ‘작품’이다. ‘매키넌 앤 사운더즈’는

인형 애니메이션에 사용하는 인형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영국의 회사이다. ‘매키넌 앤 사운더즈’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을 꼽는다면

우선 국내에 비디오로도 출시된 그로테스크한 인형 애니메이션 <샌드맨>을 들 수 있다. 만약 <샌드맨>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팀 버튼의

<화성침공>에 등장하는 화성인들이 이 회사의 작품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정교한 손맛을 느끼게 하는 이 회사의 인형들은 예쁘고 귀여운 캐릭터보다는 음산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매력이 있다. 특히 카메라의

각도와 눈의 움직임에 따라 희로애락의 온갖 감정을 자아내는 인형의 표정은 다른 인형 캐릭터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들만의 독보적인 특기이다.

하나 더, <가발제작자>의 감독은 스테판 쉐플러, 제작은 아네트 쉐플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남매이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