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어떤 영화에 쓰인 음악의 역사적, 음악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감상할 수 없을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실제로 의외로 많다는 걸 염두에 두자. 그렇게 되면 음악은 단순히 ‘쓰이는’ 요소라기보다는 한 영화를 구성하는 역사적, 상황적 맥락의 짜임을 구성하는 여러 층위의 감각적 구조물 중 하나이다. 스파이크 리의 1990년작 <모 베터 블루스>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영화는 재즈 신의 뒷이야기를 중심소재로 삼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분에 하드 밥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퀸텟이 등장한다. 비밥 스타일 재즈의 인트로는 보통 트럼펫과 색소폰의 유니즌(제창)으로 제시된다. 그러다가 그것이 갈라지면서 각 파트의 즉흥연주로 이어진다. 화합과 갈라짐, 그리고 다시 화합으로 이루어지는 이 퀸텟 연주 장면은 영화 전체의 흐름을 압축하고 있다. 덴젤 워싱턴이 블릭 길리엄이라는 트럼펫 주자로 나오고 웨슬리 스나입스가 셰도우 헨더슨이라는 색소폰 주자로 나온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흑인들에게 재즈란 어떤 의미를 지닌 음악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흑인들에게는 재즈에 대한 이율배반의 감정이 있다. 흑인 거리의 생생한 현장성을 뿌리로 하고 있는 힙합의 강렬함이 이미 흑인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재즈는 그들에게조차 일종의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흰 손수건은 하나의 추억거리이기도 하지만 백인에게 굽신거리는 엉클 톰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재즈의 주요 청중은 흑인이 아니다. 그 청중은 조금은 고급스런 취향을 지닌 부르주아들이다. 왜 흑인들이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 흑인 음악가들이 꽤 많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전히, 재즈는 흑인 음악의 위대한 자산 중 하나이다. 뉴올리언스의 브라스 밴드에서 시작해 1960년대 뉴욕의 가장 쿨한 클럽에서 펼쳐지는 프리 재즈에로 이르는 그 도도한 물줄기는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설움과 애환, 그리고 음악적인 감수성이 잘 녹아 있다. 그 무엇에 이렇게 그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으랴. 그래서 재즈는 여전히 흑인의 자부심이고 흑인 역사의 위대한 일부이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문화적 조건 자체가 이 영화를 움직이는 갈등의 원인이다. 덴젤 워싱턴(블릭)은 재즈 안에 푹 빠져 있고 재즈의 본질을 추구하나 오히려 재즈에 갇혀 있는 근본주의자이다. 반면에 웨슬리 스나입스(셰도우)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털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현실주의자이다. 둘이 한 밴드의 멤버로 설정됨으로써 그 밴드는 흑인들이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재즈가 무엇이냐를 되묻는 밴드가 된다. 결국 블릭은 싸움에 휘말려 입술을 찢기는 바람에 더이상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된다. 이 착잡한 설정은 재즈라는 위대한 자산이 지금 자신들에게 무엇인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결론적으로 스파이크 리는 존 콜트레인에게로 돌아가 해답을 구한다. 사운드트랙 앨범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영화 후반부의 여러 장면에서 존 콜트레인의 불후의 작품 <지고의 사랑>(Love Supreme)이 인용되고 있다. 존 콜트레인의 후기 음악은 이집트의 나일강과 미국의 미시시피강을 이어놓고 있는 듯한 원대함과 도도함을 지니고 있는 위대한 음악이다.
사운드트랙에는 그 유명한 <모 베터 블루스> 테마가 들어 있다. 영화에서 이 곡이 연주되는 대목은 매력적이다. 블릭은 청중에게 ‘블루스를 아는가’하고 묻는다. 브랜포드 마살리스, 테렌스 블란차드, 제프 테인 와츠 같은 당대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들이 연주한 사운드트랙이라 하드 밥의 현주소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음반이다.
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