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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도 뒤집어본 오즈
2001-02-02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케히코 지음·윤용순 옮김/ 한나래 펴냄/ 1만6천원

당대의 오즈는 이를테면 국민 감독이었다. 오즈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이었고, 오즈의 영화는 가장 일본적인 영화로 통했다. 그의 서민극 혹은 ‘홈드라마’가 지닌 견고한 탈정치적 일상성은 혈기방장한 후배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일반 관객에겐 오즈적 세계의 한결같은 친숙함과 안온함의 표지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오즈 영화의 불가해한 형식미엔 기라성 같은 서구 학자들의 연구성과가 헌정됐지만, 이런 와중에도 오즈 미학의 뿌리는 선이나 명상 같은 일본적 또는 동양적 정신성에서 종종 찾아졌다. 국민 감독 시절보다 더욱 견고하게 일본적인 감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이런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저서다. 도쿄대 총장이며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하스미는 오즈의 영화를 영화의 한계에 도전하는 영화, 일종의 아방가르드적 에너지로 충만한 영화로 보는 것이다. 그는 앞선 연구자들과는 달리 오즈의 미학적 원칙을 비서구적인 전통에서 찾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이를테면 하스미는 ‘프레임을 비움으로써 채움을 넘어선다’는 투의 부정의 언술로 오즈를 설명하는 방식을 피한다. 그것은 서구학자들을 미혹케 할 만한 수사긴 하지만, 오즈의 텍스트들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포기하는 행위다. 문제는 개별 텍스트들인 것이다. 하스미는 오즈의 텍스트들의 안팎을 바람처럼 넘나들며 놀라운 지적 오디세이를 감행한다. 이 시도가 감독론으로선 유례없이 드라마틱한 에세이를 낳는다.

이 책은 요약이 불가능하다. 체계 세우기에 관심 없는 하스미는 “이 화면에서 저 화면으로 질주하면서 섣불리 그 하나를 특권화하지 않는 것”이다. 텍스트들 사이를 질주하는 그의 글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미의 명멸을 목격한다. 그 의미 가운데 크고 작은 것을 가려내는 게 아니라, 명멸하는 의미들의 추적 과정 자체가 하스미의 오즈론의 중심이다. 오즈는 의미를 가두지 않고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열어두었고, 그것이 작가로서 오즈의 위대성인 것이다.

<만춘>의 한 장면을 12쪽에 걸쳐 분석하는 마지막 장은 하스미식 비평의 역동성을 거의 감동적으로 체험케 한다. 홀아비인 아버지(류 치슈)와 노처녀 딸(하라 세쓰코)이 한 이불을 덮고 대화를 나누는 숏에 이어 달빛 창가에 실루엣으로 비친 항아리가 등장한다. 하스미가 보기에 이건 근친상간적 욕망에 대한 억제이고, 억제의 상투성과 그 상투성의 승리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비애를 감추는 오즈의 길이다. 이것이 한없이 감동적이지만 하스미는 “그 감동의 질을 분석할 의욕을 거의 버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보는 이에게 남겨진 것은, 하라 세쓰코와 더불어 처음 찍은 이 작품을, 2층 방을 공허하게 남긴 채 끝냈다고 하는 사실일 뿐이다.” 하스미는 자신의 활주하는 언어를 쫓아온 사람이라면 결국 공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결론에 이른다. “무(無)란 한편의 영화 속에 그려져 있는 게 아니라 보는 도중에 겪게 되는 체험이다. 그것이 잔혹함과 경계를 접하는 쾌락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의미 탐색의 부담을 수사로 피해가는 대목들이 눈에 띠긴 하지만, 텍스트와의 대화란 이런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분류와 고정에 익숙해진 평자들에겐 모든 면에서 신선한 충격이 될 것 같다.

허문영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