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국내의 대중음악계를 결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있다면 바로 ‘하드코어’일 것이다. 그 중심에는 4년 만에 돌아온 서태지와 지난 6월에 있었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내한공연이 있다. 특히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밴드의 절정기에 공연을 가져 국내 하드코어 팬들의 큰 관심을 끌었는데, 10월에 이들은 또 하나의 뉴스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바로 밴드의 주축이었던 보컬리스트 잭 데 라 로샤(Zack de la Rocha)의 밴드 탈퇴 소식이 그것이다. 이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2월에 우리 앞에 한장의 음반을 던져주었다.
릭 루빈이 프로듀스를 맡은 라는 이름의 이 음반은 12곡의 수록곡을 커버곡으로 채우고 있다. 마르크스를 다시 불러오고 체 게바라 유행을 이끌어낸, 그래서 항상 ‘정치의 문제’가 따라다니는 밴드지만 사운드는 정통 록의 어법을 충실히 지키는 그들이라 커버 앨범 기획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그래서 1993년 건즈 앤 로지스의 펑크 커버 앨범 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건즈 앤 로지스 역시 메탈 밴드 가운데 비교적 정통에 충실한 편이었다. 특히 이 앨범 이후 아직까지 별다른 활동이 없다는 점은 마치 레이지의 향후 앞날을 불길하게 암시하는 것만 같다.
음반으로 돌아오면, 이 앨범의 원곡들은 실로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올드스쿨 힙합의 원조인 아프리카 밤바타에서 에릭 비 앤 래킴, 사이프러스 힐 등 하드코어 힙합 그룹과 MC5, 스투지스, 마이너 쓰레트 같은 펑크에 젖줄을 댄 밴드의 음악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뉴웨이브 밴드인 데보를 비롯해서 롤링 스톤스,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곡이 사용된 것은 좀 뜻밖이다. 대신 이 곡들은 이들 손에 의해 레이지 식으로 변형되었다. 그래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사람한테 들려주면 다들 오리지널 곡이라 생각할 정도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으로 인해 앨범은 전체적으로 모난 곳 없이 일관된 색을 갖추고 있다.
사이프러스 힐의 B-리얼이 차기 보컬로 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아무래도 에 가장 관심이 간다. 원곡의 날카로운 맛을 비교적 살린 이 곡과 더불어 펑키(funky)한 그루브와 리프를 잘 조화시킨 아프리카 밤바타 원곡인 는 앨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트랙이다. 또한 평소 레이지가 콘서트에서 즐겨 연주한 MC5의 곡 는 오리지널에 가장 가까우며, 의외의 트랙은 데보의 를 다소곳하게 연주한 것이다. 한편 와 은 거의 원곡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구성되었다.
그동안 이들은 각종 정치적인 집회의 참여와 과격한 노래말로 사상적 지표를 밝힌 바 있지만, 이 앨범은 자신들의 음악적 영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잭의 밴드 탈퇴로 밴드의 행보가 불투명해진 가운데 하드코어 역사의 한장을 마무리하는 앨범으로 기억된다는 점에서는 한편 씁쓸함도 남는다.
장호연/ 대중음악평론가[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