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멸 감독은 내가 지난 몇년간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 CGV 무비꼴라쥬상을 받은 그의 신화적인 저예산 코미디 <뽕똘>이 지난해 8월 조용히 극장 개봉하고 사라질 때 나는 ‘감독과의 대화’(GV) 사회를 맡으면서 그를 처음 봤다. 어떻게 찍어냈는지 신기할 만큼 <뽕똘>은 홈무비 수준의 예산으로 만든 최저 수준의 만듦새를 감추지 못한 영화였는데 그 지역의 아우라가 짙게 서려 적당히 낄낄대며 난센스 코미디 같은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슬픔만 남게 되는 기묘한 영화였다.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오멸 감독은 경쾌한 외피를 두른 영화의 인상과 달리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 중에 내가 <뽕똘>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제주도를 담은 영화라 좋았다”고 한 대목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이 ‘내부자’의 정체성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제주도 사람의 처지를 슬퍼하고 있었다. 올레길 개발로 관광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시점에서 그는 제주도를 떠났다고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말했다. 그날의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으나 서로 놀랄 만큼 마음이 맞았던 행복감은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그가 중요한 영화를 만들 사람이란 예감을 받았다.
그 뒤 나는 그가 후속작으로 <이어도>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를 보지 못했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가 <이어도> 후속작으로 만든 <지슬>을 보며 기다리던 것이 찾아왔다는 느낌으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조건에서 겨우 영화를 만들어왔던 그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되자 굉장한 역작을 세상에 내놓았다(<지슬>은 부산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을 비롯해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주는 감독상, CGV 무비꼴라쥬상을 휩쓸었다).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뜻하는 제목의 <지슬>은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에 비범한 기운이 가득하다. 제주 사람들이 모시는 신들만 1800여 신이 있다고 하는 그 지역 특유의 무속적 기운이 화면 바깥에서 화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착각을 주는 이 영화는 카메라가 마치 보이지 않는 신의 시점을 자임하는 듯하다.
가늠할 수 없는 공포와 일상의 온기 사이
(이제부터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유념해서 쓰겠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건의 재현에 기초한 스토리가 아니라 그걸 포착한 감독의 스타일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연기가 자욱한 제주도의 어느 전통 가옥을 군인이 헤집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불은 군인들이 지른 것이고 방금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이 끝났다. 폐허 같은 집 마루에는 제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이윽고 군인이 어느 방으로 들어가자 죽은 여자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고 시체 옆에 있던 다른 군인이 주는 사과를 받은 첫 장면의 군인은 제상에 올릴 사과인 양 칼로 조심스레 깎는다. 학살과 제의의 제스처가 겹치는 이 첫 장면의 아우라는 이후로도 지속된다. ‘신위’(영혼을 불러앉히기 위해 위패를 모심), ‘신묘’(영혼을 모시는 곳), ‘음복’(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소지’(지방지를 태우는 것)등으로 소제목을 붙인 전개 속에서 실제 영혼들을 위무하려는 간절한 카메라로 이 제주도라는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비극을 재현하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지슬>의 형식적 전략으로 구사된 롱테이크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의 변종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화면에 영적인 기운을 불러오는 장치다. 영화는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 산속의 동굴로 피난간 민간인들과 그들을 소탕하려는 군인들의 모습을 병렬하고 있는데, 범속한 것과 초월적인 것이 자연스레 뒤섞여 있다. 영화 초반, 겨우 목숨을 건져 야트막한 산의 구덩이에 몸을 숨긴 마을 주민들이 평소 하던 대로 티격태격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이, 아니면 방금 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그들 삶의 일상적 관계로 쉽게 옮겨온 말과 행동을 보여줄 때 우리는 이 비극을 보는 감독의 지근거리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관념적으로 재구성된 것이 아니라 어제 형제, 자매, 친구가 죽었어도 오늘은 평소 관계대로 티격태격하는 이 일상적 모습은 이것이 매우 지극한 감독의 인간관찰과 애정에서 비롯된 연출임을 알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토벌대 군인들의 모습을 처음 보여주는 장면에서 지휘자인 김 상사는 추운 겨울바깥의 한데서 배설을 하고 있으며 뭔가 닦을 것을 가져오라고 고참 상병에게 명령하는데 그가 슥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저 아래 구덩이에는 아직 죽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누군가의 발이 보인다. 김 상사는 심드렁하게 그자를 처치하라고 상병에게 명령하고 화면에는 곧 총성이 들린다. 추운 데서 배설하느라 용을 쓰는 김 상사와 그 배설 현장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참극을 심상하게 배열하는 이 장면 뒤로 나무 아래서 발가벗고 기합을 받는 일병과 그를 측은히 여기는 이병이 보인다. 상사는 기합을 준 당사자인 상병을 불러 연유를 묻고는 잘해주라는 형식적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뜨는데 상병은 더욱 분기가 탱천해 빨갱이를 한명도 잡지 못한 이 신참 일병을 괴롭히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와 찬물을 들이붓는다. 폭력의 가해자인 군대 내부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폭력에 대한 신념의 유무로 명확하게 구분해 인물들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도 일상적 행위들은 무심하게 나열되지만 그것들의 외피와 달리 내연적 의미는 두껍다. 용변과 기합은 군대에서 일상적 사건의 일부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강렬한 이미지의 잔상을 남긴다. 개인적인 가족사의 원한으로 빨갱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증오심에 불타는 강상병의 신념과 죄없는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는 김 일병의 신념은 똥을 싸는 사람과 그 언저리에 죽어 나자빠진 피해자의 모습과 유비관계를 이루며 뭔가 발산해내야 하는 광신적 권력의 이념과 집행의지가 초래하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평범한 척 그려낸다.
이런 대비는 마침내 타지 사람들이 찾기 힘든 동굴 속에 숨어들어간 마을 사람들이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자신들에게 닥친 사정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누군가가 챙겨온 감자를 서로 나눠 먹는 중반부의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지난한 역사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방해받지 않았을 그들의 일상적 삶의 지속은 이 동굴에서도 지속되는 것이어서 그들은 마을에서 나누었음직한 말과 행동을 피난온 동굴에서도 되풀이하고 있으며 극적 정황의 단서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린다. 그들은 공포에 떨고 있지만 그 공포는 겉으로 노골화해 발설되지 않는다. 공포는 순간순간 그들의 삶을 엄습해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공포는 아직 실감나지 않는 공포다. 그 공포는 원인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엄청나게 무서운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혀 그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감자를 나눠 먹으며 잠시 동안이지만 일상적인 온기를 부분적으로 맛본다.
세속의 비극과 유리된 초월적 기운
어떤 상황에서도 일상적 무심함을 포착하는 오멸의 연출은 그 와중에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관객에게 동시에 준다. 일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이 한 화면에 병존하는 것이 오멸의 카메라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게 이 영화의 길게 찍기 스타일에 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 의미론적으로도 매우 고양된 차원을 만끽하게 해준다. 검은 동굴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좁은 통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을 때 화면은 연극적으로 배치된 마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 수평적으로 느리게 이동하고 있는데 그들 앞에 타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모닥불의 밝기에 따라 그들의 모습과 행동의 윤곽이 식별되고 있는 동안 카메라는 부드러운 리듬으로 천천히 계속 이동한다. 이 장면은 일상적 행위를 담고 있는 듯하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미세하게 조정된 앵글 변화에 따라 관객인 우리는 이들의 불우한 역사적 비극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화면 안에 양식적으로나마 마련된 또 다른 세계로의 출구를 경험한다는 일종의 편안함마저 갖게 된다. 일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의 병존을 처리하는 오멸의 스타일은 이 장면 외에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예만 더 들어보면, 영화 초•중반 술에 취했는지 방 안에서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 김 상사의 모습을 보여준 뒤에 카메라가 역방향으로 바꿔 마당으로 천천히 이동하면 마당 한가운데 놓인 가마솥에 물이 펄펄 끓고 있고 군인들이 방금 도살한 듯 큰 돼지를 들고 와 솥에 빠트리는 대목이 있다. 카메라는 이때쯤 부감 시점으로 올라가 가마솥에 빠져 무기력한 몰골로 있는 돼지를 잡고 있으며 화면 오른쪽 하단에서 질질 기어오는 김 상사가 술 취해 헛소리처럼 여자도 잡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이 장면에서의 카메라 이동과 앵글은 비범하다. 지속을 위한 지속, 이동을 위한 이동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이의 시선이 그 현장에 입회해 지켜보고 있다는 암시가 강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식량거리로 도륙한 가축의 시체가 솥에서 삶아지기 시작하는 광경은 은연중에 제의적 분위기를 풍기면서 미친 살육의 현장을 제사 치르는 엄숙한 분위기로 감싸안는다.
흑백으로 촬영된 화면을 통해 카메라가 지켜보고 이동하고 가능한 한 그 장면에서 뭔가를 응시하려 한다는 태도를 취할 때 이것들이 관객에게 하나씩 차례로 벽돌처럼 쌓이면 중반이 넘어가는 대목에선 카메라가 보이지 않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정해서 말하자면 감독이 마음속으로 계속 울면서 이 장면들을 제사장처럼 집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영화 후반, 군인들이 마을의 어느 한집을 샅샅이 뒤지며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는 장면에서 군인들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액션의 단위들을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니라 군인의 등 뒤로부터 그 상황을 깨어 있는 눈으로 지켜본다는 입장이 강하다. 현실의 사운드가 지워지고 누군가의 숨소리로 대치된 사운드가 흐를 때 물론 그것은 이 상황에 비극적인 절망감을 느끼는 스무살 졸병 군인의 심장소리라는 것을 관객이 알게 되지만 아수라장의 학살극 복판에 자리해 묘하게 깨어 있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 세속의 비극과 유리된 초월적인 수직적 기운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하나의 비극적 그릇을 수천년동안 이 땅에서 동고동락한 세속적 신, 누군가의 시점이라는 더 큰 그릇으로 담아낼 수 있다고 하는 추측만으로도 우리는 이 비극을 끝까지 응시하면서도 심리적으로 물러서고 패배하지 않을 수 있다. 곧 값싼 동정심의 카타르시스 단계를 통하지 않고 사태를 직시할 수 있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올해 나온 최고의 영화 중 하나
<지슬>은 처음과 끝 장면에서 4•3 사건의 전말을 간단히 자막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영화 자체의 내용도 그 역사적 문맥을 다 포괄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학살하는 권력의 편과 학살당하는 피해자의 편에 고루 카메라를 배분하고 어느 편에서든 이것에 저항하는 자들의 마음을 담는다. 물론 이 부당한 이념적 학살극의 피해자들은 변변한 항변도 하지 못하고 다 당했다.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죽는 영화 속 젊은 여자 순덕에서부터 동굴에서 매운 고추 연기를 피워내며 항거하는 마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당하지만 그들의 무구함은 선의 표식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그들의 일상적 상식으로는 접수할 수 없다는 그들의 무지로 제시된다. 그 무지의 암흑 속에서 그들은 일상적 삶을 영위해가며 덧없는 최후를 맞이하지만 오멸 감독은 그들의 죽음에 벗으로서 다가가는 카메라를 신중하게 연출함으로써 한국사회가 아직도 답해주지 않았고 어떤 역사적 평가도 온전히 이뤄지지 않은 4•3 사건을 초월적 신령의 기운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지켜본 제주도 산하의 기운으로 감싸안는다.
이것은 영화적 기적이다. 카메라로 해낼 수 있는 최상의 씻김굿이며 눈물과 피로 쓴 위령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지식인의 형식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일상의 공기를 끌어안으면서 해낸 것이 오멸 감독의 재능이다. <지슬>은 올해 나온 최고의 영화들 가운데 하나이며 앞으로도 퇴색하지 않을 불멸의 기세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