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상처를 공유한 철훈(신성일)과 신혜(윤정희)의 동거는 파국을 맞는다.
제작 태창흥업주식회사 / 감독 이성구 / 상영시간 101분 / 제작연도 1968년
1950년대 후반까지의 한국영화가 고전 할리우드영화의 장르와 문법을 소화하는 데 몰두하고 나름의 길을 찾는 데 성공했다면 1960년대 초부터는 서구의 누벨바그를 의식해 기성영화계에 도전하는 신인감독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충무로 상업영화 시스템 속에서도 영민하게 모던 시네마의 길을 개척해갔다. 그 최전선에 있던 감독이 바로 이성구다. 그는 한국영화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겠다고 야심차게 선언한 신예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젊은 표정>(1960)으로 데뷔한 후, 역시 신예프로덕션이 제작한 <정열 없는 살인>(1960)을 두 번째 작품으로 연출했다.
전자는 닛카쓰 태양족 영화의 영향이 감지되는 청춘 영화이고, 후자는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의 범죄소설을 이성구가 직접 각색한 스릴러다. 두 작품 모두 일본영화계를 경험한 재일 교포 출신의 전홍식이 프로듀서였고, 김지헌이 각본을 맡았다. 신예프로덕션은 전홍식과 김지헌, 이성구 외에도 <도망자>(1964)를 연출한 이강원 감독이 함께한 동인제 조직이었다.
이후 이성구는 매년 1~2편의 멜로드라마 또는 가족 코미디를 연출하며 기성영화계에 묻히는 듯했지만 문예영화 제작 붐을 계기로 다시 도약한다. 1967년 <일월>(황순원 동명 소설 원작)과 <메밀꽃 필 무렵>(이효석 동명 소설), 1968년 <젊은 느티나무>(강신재 동명 소설)를 연이어 감독하며 연출력을 가다듬은 후, 그의 최고작이자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장군의 수염>을 내놓는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서로 다른 재능들이 일시에 한자리에 모여서 마치 세션을 벌이는 것처럼 한편의 영화를 만들고 헤어진 희귀한 순간”으로 표현한 것처럼,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예술적 재능들이 모더니즘 영화라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모인 흥미로운 결과물이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1966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소설가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 속 애니메이션은 신동헌 화백이, 영화미술은 서양화가 변종하 화백이 합류해 영화의 재질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암흑에 싸인 방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여자들의 비명이 들린 후 크레딧 배경 화면을 통해 남자의 방이 소개된다. 방의 주인은 바로 전직 사진기자인 김철훈(신성일)이다. 남자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글귀와 그림, 사진 등이 걸려 있는 벽을 천천히 훑은 카메라는 뚜껑이 열려 있는 연탄난로를 줌인하며 사건의 일차적인 원인을 알려준다. 과연 자살일까, 타살일까. 초반부 영화는 누가 철훈을 죽였는지 추적하는 데에 집중한다. 현장에 도착한 박 형사(김승호)와 부하 형사(김성옥)가 주인집 노파(정애란)를 추궁하지만 그동안 철훈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며 자신은 셋방을 잘못 놓은 죄밖에 없다고 말한다. 박 형사는 세 갈래의 수사 방향을 정하는데, 철훈의 편지에 등장한 소설가 한우정(김동원), 나일론 스타킹과 없어진 카메라, 그리고 철훈의 이마에 있는 흉터다.
굳이 서사 진행과는 상관없는 공터에서 모터사이클 훈련을 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갑자기 등장한 후,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된다. 경찰서로 불려온 소설가 한이 박 형사의 취조를 받는데, 박 형사가 철훈의 편지를 보여주며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며 언성을 높이자 한은 엷은 미소를 띠며 이건 소설을 쓰겠다는 얘기라고 맞받아친다. 한이 소설을 써보겠다고 자신을 찾아온 철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첫 번째 플래시백에 들어간다. 소설의 줄거리나 들어보겠다는 한에게 철훈은 줄거리는 해골 같은 거라고 투덜거리며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때 영화 속 소설 <장군의 수염>이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영화는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자기 반영적인 형식을 취하며 전세계적인 모더니즘 영화의 조류에 과감하게 합류한다. 한편 부하 형사는 스타킹과 카메라를 단서로 수사에 나선다. 철훈과 동거한 전직 댄서 나신혜(윤정희)의 집을 찾아갔다 소득이 없자, 철훈으로부터 카메라를 받은 누드모델을 만난다.
박 형사와 부하 형사는 좀처럼 수사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부하 형사는 연탄난로를 사용한 자살로 규정하고, 박 형사는 철훈의 지저분한 손톱과 유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자살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둘밖에 남지 않은 새벽녘의 경찰서에서 2분 이상 대사를 주고받는 인상적인 롱테이크 장면이 끝나고, 두 형사는 다시 주변 사람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철훈의 동료인 사진부 기자(문오장)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철훈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다음은 철훈의 어머니(한은진)와 누나(김신재) 차례다.
40분 정도 러닝타임이 흐른 시점, 다시 오토바이 경찰들의 훈련 장면이 삽입되며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다. 경찰서에 온 신혜를 두 형사가 취조하는 장면이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지만 긴장감의 밀도는 끝까지 유지된다. 이때 미장센도 제 역할을 수행한다. 신혜를 화면의 중앙에 두고 왼쪽 전경에는 박 형사의 뒷모습을 오른쪽 후경에는 후배 형사를 배치해 그녀를 압박하는 것처럼 연출된 구도로 시작하지만, 각자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변화의 순간마다 화면 속 인물의 배치가 달라진다. 변주의 양상을 포착하는 것도 영화의 주요 감상 포인트다.
신혜의 플래시백은 영화적 현재와 여러 지점의 복잡한 과거를 오가고, 그녀의 플래시백에서 다시 철훈의 플래시백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입체적인 구조를 펼쳐낸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의 비극이 나 목사뿐만 아니라 철훈과 신혜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드러난다. 비밀 댄스홀에서 일하던 신혜는 경찰의 단속으로 잡혀가게 되자, 취재를 나온 생면부지의 철훈에게 아버지를 부탁한다는 메모를 전하며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가까워진 철훈과 신혜는 ‘고해놀이’를 통해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유일하게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을 전장에서 잃었다는 철훈의 고백에, 신혜 역시 1·4 후퇴 때 중공군에게 강간당한 끔찍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서로의 상처를 공유한 둘은 철훈의 방에서 ‘표류놀이’로 부르는 동거를 시작한다. 둘은 치유하기 힘든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신혜는 현실 세계로 향한 끈을 놓지 않으려 하고 철훈은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려고 한다. 결국 신혜는 철훈을 떠난다. 철훈은 떠나는 신혜에게 소설 <장군의 수염>의 남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번에는 변종하의 추상미술이 배경으로 사용된다. 두 형사는 정신분열에 의한 자살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에 합의하지만, 박 형사는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이때 우리는 이 영화가 누가 철훈을 죽였는지가 아니라 왜 그가 죽었는지에 대한 탐구였음을 깨닫게 된다.
엔딩은 집으로 돌아가는 박 형사의 얼굴과 그의 내레이션이 맡는다. 모터사이클을 탄 경찰이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것을 신호로, 영화는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기 힘든 한국 사회의 현실로 복귀한다. 오랜만에 수박을 사들고 집으로 가는 박 형사의 모습은 <휴일>(감독 이만희, 1968)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 시기 한국영화가 고안한 일종의 타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