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도 나쁜 남자다, 라고 영화평론가 김경욱은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2004년 <씨네21> 451호에서 김경욱은 ‘페미니즘의 비평적 딜레마를 응시하기’라는 제목의 비평을 통해 “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용서가 안 되는데, 홍상수의 영화는 도마 위에도 오르지 않는 것일까?”라고 묻고 “결국 홍상수든 김기덕이든, 그들 영화 속의 남성 인물들은 고통의 자리를 껴안거나 게임의 형식을 가져와서, 여자를 즐긴다. 그들 영화가 주는 지옥 같은 경험은 그 즐거운 향락에 있다”고 썼다. 심지어 홍상수의 영화에 한해서는 “여자들은 매번 남자들의 성적 욕망과 이기심의 대상으로 축소되고 소비된다. 여자가 완강하게 거절할 때 폭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섹스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대신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는 법이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하고 싶어 하거나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이때는 홍상수 감독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까지만 만들었을 때다. 그러면서 “홍상수와 김기덕의 관심은 결국 동일한 것”이라며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자멸하기 전에 김기덕이든 홍상수든(혹은 이창동이든)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휴머니즘이라고 나는 믿는다”라고 마무리했다. 나 또한 김경욱 평론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공교롭게도 일찌감치 준비했던 페미니즘 특집을 마무리 지을 무렵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가 포털 사이트 검색어 상위를 차지했다. 저열하게 확인도 안 된 말을 따옴표까지 따가면서 박아넣은 허위 기사들이 인터넷을 도배했고, 결국 감독의 가족은 해당 언론사를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홍상수나 김민희 영화를 보았건 안 보았건, 막장 드라마의 인물들 대하듯 대중들이 천박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뒤였다. 더구나 기사들은 하나같이 두 여성의 막장 대결로 몰아가면서 정작 ‘남편’은 그 다툼에서 쏙 빠져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를 보면서 힘든 여성의 유대라는 측면에서 뉴 저먼 시네마의 어머니라 불리는 마가레테 폰 트로타를 떠올렸다. 그녀 또한 ‘이상을 위해 폭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라는 딜레마를 안겨줬던 감독이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폴커 슐뢴도르프와 공동 연출한 <카타리나 블룸의 실추된 명예>(1975)에서는 황색언론에 의해 테러리스트 공범으로 몰린 한 여성이 그 수모를 겪게 만든 기자를 살해한다. 첫 단독 연출작 <크리스타 클라게의 두 번째 각성>(1977)에서는 주인공인 유치원 교사가 유치원 경영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결국 은행을 턴다. 그런 모순에 대해 트로타가 해답으로 제시한 것은 여성의 유대를 통한 폭력적 상황의 극복이다. 가령 <독일 자매>(1981)에서 언니는 여성신문 편집자인 페미니스트이고 동생은 투쟁의 방편으로서 폭력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테러리스트다. 이후 동생의 의문의 자살을 파헤치던 언니는, 자매의 행동이 결국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반항이라는 공통된 출발점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한편, 그 여파는 <씨네21>에도 날아들었다. SNS와 메일을 통해 대략 다음과 같은 항의가 쏟아졌다. 이번 사태에 대해 홍상수 신격화에 앞장선 <씨네21>의 공식 입장을 밝혀라, 올해 연말 결산에서도 홍상수 영화가 1위를 하거나, 김민희가 올해의 여배우로 선정된다면 다시는 <씨네21>을 보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밝혀둘 것은 홍상수의 신작 개봉 계획은 전혀 알려진 바 없고, 연말 결산은 온전히 <씨네21> 안팎의 개인들의 투표 집계로 이뤄진다. 그럼에도 마치 <변호인>을 좋아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고, <귀향>을 좋아하지 않으면 역사의식이 부족한 매국노라는 식의 공격들이 이번 일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제발 정신들 좀 차리시라. 그래서 나 스스로도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번호 특집이 적잖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