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6년전쯤 공중파 TV로 <우묵배미의 사랑>을 다시 보다가 혼자서 한참 씩씩거렸다. 이번주 ‘내 인생의 영화’로 이 작품을 고른 김해곤씨만큼 열렬하지 않을진 몰라도, <우묵배미의 사랑>은 내 20대의 마지막 구비에서 오랜 술친구처럼 찾아와 마른 지푸라기같던 마음을 어루만져준 속깊은 영화였다.
지금도 배일도와 민공례의 못나고 궁상맞은 기차여행을 떠올리면, 그 시절, 너무 젊어 피하지 못한 상처와 조로한 비겁이 놓아버린 소망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잠시 청승을 떨게 된다. 멀리 떠나와 여관방에서 공례와 처음 살을 맞댄 배일도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특히 잊을 수가 없다. 정사장면이 그렇게 슬플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그 뒤론 어떤 영화의 정사장면에서도 그런 절절함을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TV에서 방영한 <우묵배미의 사랑>엔 그 정사 장면이 삭제돼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처구니 없고 분통 터져서 처음엔 허, 허, 하는 소리만 새나왔다. 그 장면은 별다른 노출이 없으니 문제될 게 없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당연히 방영을 하지 말아야 했다. 배일도의 눈물 어린 정사가 없는 <우묵배미의 사랑>은 <우묵배미의 사랑>이 아니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 폭력이었다. 내 작품이 다친 것만큼 속이 쓰렸다.
세기가 바뀌어도 야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한주는 <알리> 삭제로 시끄러웠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감시의 눈이 많아졌고 관객의 정보교환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는 것. 그런데도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건 대단한 배포다. 사실은 개봉 열흘 전쯤 잘랐다는 소문을 입수하고 해당 영화사에 확인전화를 했다. 영화사 쪽에선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느냐"며 펄펄 뛰었다. 그렇게 펄펄 뛰고 있을 때, 모든 건 결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열흘 뒤면 들통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했다. 또다른 영화사 사장은 흥행만을 염두에 둔 영화는 그래도 괜찮으니 자기가 수입한 영화는 잘라서 개봉하겠노라고 당당히 말했다.
영화는 너무 커서 오히려 다치기 쉽다. 너무 커서 윤리적 정치적 상업적 손길에 시달리고 상처입었다. 그건 영화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스크린쿼터를 지지하고 우리 영화를 지키고 키워 문화적 종다양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화를 문화로 대하고 있고 그래야 한다. 어떤 영화가 누구 눈에 쓰레기로 비칠지라도, 그걸 쓰레기라고 욕할 순 있지만, 그걸 만든 이가 아니라면 자를 순 없다. 삭제의 폭력이 묵인된다면 우리는 더이상 영화나 문화를 말할 자격이 없다. 그 입으로 말하는 스크린쿼터 수호는 개소리다.
영화를 좋아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의 가장 초보적인 소망은 영화를 온전히 보는 것이다. 삭제는 그 소박한 소망을 짓밟는 폭력이다. 정말 삭제돼야 할 건 더러운 가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