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보면서, 처음엔 신났고 나중엔 찜찜했다. 신난 것도 찜찜한 것도 작품성과는 관계없다. 처음 1시간여 가량은 오우삼 영화 같아서 신났다. 첩혈쌍웅으로 통칭되는 멋진 두 남자의 의리와 개폼은 아직도 마음 설레게 한다. 지상의 계율이 적으로 갈라놓았으나 형제의 영혼을 지닌 사내들의 비감한 운명적 조우. 유치하다고 몇번인가 비난을 들었지만 그 유치한 기호에서 벗어난다는 게 무지 힘든 일이라는 걸 의 멋진 전반부가 깨닫게 해주었다. 취조실의 장동건 앞에 앉은 나카무라가 “이름은?”하고 물을 때 아득한 슬픔과 분노에 젖은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비춰주는 장면에선 “야, 죽인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게 멋있는 건 지상의 율법으로부터 그들의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는 그렇게 시작했지만, 결국 배신한다. 배타적 민족주의, 그 단순한 세속적 정치학으로 돌아간다. 그게 싫었다. 멋있으려면 끝까지 멋있어야 한다. 그런 영혼은 지상의 질서에 포섭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멋있다. 지상의 어떤 이데올로기, 그것도 신뢰하고 있지 않은 주류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이면 내 머리는 복잡해지고, 그때부터 영화적 쾌감은 도망가버린다. 이번에도 그 민족주의가 문제였다.
영화세상에선 의외로 민족주의와 대면하는 일이 잦다. 스크린쿼터 문제가 불거질 때면 으례 민족주의적 주장이 여기저기서 솟아난다. 지난해에는 워너 계열 언론사가 한국인의 개고기 관련 오보를 냈다고 워너의 <해리 포터>를 보지 말자는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에 김동성이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뺏긴 사건을 두고선 미국영화 보지 말자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종석 아저씨가 <감염된 언어>에서 펼쳤던 모든 민족주의는 나쁘다는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는 쪽이지만, 설사 민족주의에 긍정적 힘이 있다 치더라도 우리의 민족주의는 너무 일방적이고 감성적이다. 그래왔다. 를 보면 그렇고 미국 영화안보기 주장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이런 게 과연 다수의 의견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될 진 잘 모르겠다. 일단 대중적 영향력은 크지 않은 것 같다. <해리 포터>가 엄청난 흥행성적을 올렸듯이 이번에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미국영화를 보는 데 별 주저하지 않을 것같다.
흥미로운 일 하나가 최근에 있었다. <씨네21>에 몇주전 실린 스크린쿼터 관련기사에 몇몇 독자들이 반론도 충분히 가능한 사안을 두고 쿼터 옹호론만을 부각했다고 맹렬히 비난하는 글을 우리 사이트에 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글을 보고 한편으로 뜨끔했고 한편으로 반가왔다. 완고한 민족주의자라면 아마도 의심없이 스크린쿼터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로는 결국 스크린쿼터를 지키지 못한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수호투쟁은 세계영화인의 관심사며, 관심의 이유는 우리의 민족적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에 거는 희망 때문이다. 배타적 민족주의자보다 시비 잘 거는 불평분자들이 많을수록 문화는 훨씬 다양해진다. 적어도 이 점에선 관객까지 포함한 한국 영화계가 다른 분야보다는 앞날이 훨씬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