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씨는 자칭 임권택 팬클럽 회장이다. 솔직히, 임권택 감독을 추켜세우는 글은 많이 봤어도, 한사람의 관객으로서, 또 비평가로서 임권택 감독에게 열광하는 사람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나 또한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별 생각없이 본 <만다라>에 머리를 얻어맞자 한시간인가 무턱대고 길거리를 쏘다닌 기억이 있고, <서편제>를 본 뒤엔 한동안 사운드트랙만 틀면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되던 경험이 있지만, 모두가 추앙하는 한국의 거장이라니, 내가 굳이 그 대열에 낄 필요는 없겠군, 하는 삐딱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춘향뎐>이 내 태도를 바꿔놓았다. 영화 자체의 정서적 공명은 덜했을 지 몰라도, <춘향뎐>은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와 싸워, 그 싸움의 기록을 영화의 문법으로 다시 끌어안으려는 놀라운 패기와 미학적 야심으로 끓어넘치는 영화였다. 첫대면에서 느낀 당혹감은 점점 경이로움으로 바뀌어갔고, 나는 이 어눌한 말솜씨의 노감독이, 골방에서 익힌 영화 지식으로 평가되기엔 너무 큰 정신적 너비를 지닌 사람이라고 결국 믿게 되었다.
그런데, 정성일씨는 일찌감치 임 감독의 '광팬'이었다. 벌써 10년전 쯤에 임 감독과의 긴 인터뷰로 채워진 책을 발간했고, 그 뒤로도 <키노> 편집장을 거치면서, 임 감독에 대한 깊은 경의를 무엇보다 그 방대한 지면 할애로 드러냈다. 우리가 올여름 이 기획을 마련했을 때, 먼저 떠오른 인물도 그래서 당연히 정성일씨였다. 임권택 감독의 신작 <취화선> 현장에 하루 이틀이 아니라, 적어도 한달 가량 틀어박혀서 감독이 느끼는 매순간의 고뇌를 기록하고, 그걸 생생하면서도 우아한 에세이에 담아내는 일을 우리는 그에게 부탁했고, 그는 너무 반갑게 수락했다.
세상에는 (어쩌면 너무)많은 영화글이 있다. 정성일씨가 감독 스탭 배우들과 거의 100일을 동행하면서, 한달간은 숙식도 같이 하면서 써낸 이 긴 글은(우리는 150매 정도를 부탁했는데 그는 380매를 써왔다. 그것도 본인이 100매를 줄인 분량이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힘든 글이다. 이 글은, 영화가 삶이라는 그 흔한 말의 진의를, 그리고 영화 만들기가 위대한 결단의 연속임을, 무엇보다 임권택이라는 거장의 가장 내밀한 순간을, 수려하고 섬세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온 세계의 돈을 퍼담고 있는 한 외화가 큰 소리를 치고 있는데도, 무려 50쪽 분량에 이 시의성 없는 글을 전부 수록해 특집으로 꾸민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글중에 나오은 임 감독의 한마디는 아무래도 잊기 힘들다. "나는 영화광으로 살아온 기억이 없는 사람이오. 영화를 한다는 건 내가 살아간다는 방식이오. 그 안에서 영화를 새롭게 만들었다면, 그건 내가 내 삶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인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