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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2003-01-30

편집장

임권택 감독이 1980년에 만든 <만다라>는 번뇌하는 두 승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제작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촬영장소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승려에 관한 이야기이니 당연히 절이 무대여야 하는데, 어떤 절에서도 촬영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그건 얼마간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했다. 주인공인 두 승려가 전통적 승려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가운데 특히 지산은 가승(假僧), 잡승(雜僧)으로 자처하면서 기괴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자칭 땡땡이중이었고, 술과 여자도 거침없이 범하는 파계승이다.

몇달 고생 끝에 어렵사리 촬영할 절을 구했을 때, <만다라> 제작진에는 식구가 한 사람 늘어 있었다. 촬영을 거절한 어떤 절에 기거하던 승려였다. 자기 절에선 촬영을 거절했지만, 자기는 관심이 있으니 촬영에 동행하고 싶다고 부탁을 해왔고, 당시 임권택 감독은 불교 교리나 승려의 생활에 대해서 잘 몰랐던 터라, 어떤 식으로나마 영화에 도움이 되겠거니 해서 승낙했다. 임 감독 표현을 빌리면 그 사람도 땡땡이중이었다. 술판이 벌어지면 빠지는 법이 없었고 먹는 것도 가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승려는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제작진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주 <씨네21> 특집 ‘혹한의 촬영현장에 가다’를 보신 독자라면, 아니 그걸 보지 않았더라도 넉넉히 짐작하시겠지만, 겨울 촬영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눈 내리는 산 속이 촬영지라면 제작진은 거의 육체적 인내의 한계까지 체험해야 한다. 이건 별다른 설명없이 <만다라>에서 만취한 지산이 눈에 덮여 동사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임 감독이 ‘땡땡이중’이라고 말한 그 승려는 승려의 생활이나 불교에 관한 자문에다 잔심부름까지 보태고 엄한 욕까지 들어가면서 몇달간의 고생을 묵묵히 견뎠다. 그 인연은 몇년 뒤 <비구니>에까지 이어졌다.

<만다라> 촬영이 끝날 무렵 임 감독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이 땡중이, 장차 영화 만들겠다고 벼르는 연출부도 끔찍해하는 겨울의 산중 촬영에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녔을까 영화에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게다가 종단에선 그를 불러 불교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도 있는 그런 영화에 계속 협조하면 승적을 박탈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승적 박탈은 승려에겐 최고의 형벌이다)

임 김독이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혹시나 불교가 잘못 알려질까봐서요.” “….”

임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아, 이 사람이 진짜 중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임권택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그리고 1980년대 최고의 한국영화로 뽑아도 손색없을 <만다라>엔 그 ‘땡중’의 깊은 마음이 어디엔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진짜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직업이나 종교나 이념에 관계없이. 눈에 띄진 않지만 그런 사람들 덕으로 우리 사는 꼴이 조금이라도 덜 흉해지는 것 같다. 이태원 사장은 “선수끼리 서로 알아본 거지”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임권택 감독, 이태원 사장과 점심을 먹다가 얼핏 들은 건데, 혼자 듣고 말기엔 아까워서 여기 옮겼다. 다행히 그 ‘땡중’은 지금 꽤 큰 절의 주지스님으로 계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