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 프랑스 영화도시 칸의 인터뷰장에서 오시마 나기사를 비로소 만났다. 만난 게 아니라 그냥 멀찍이 지켜봤다. 그의 몸이 의탁한 휠체어를 재일동포 감독 최양일이 끌고 있었고, 곁에는 이번엔 배우로 온 기타노 다케시가 서 있었다. 어떤 질문에도 한 문장을 넘어서지 않는 단호한 답변, 그리고 오만한 눈빛과 근엄한 표정이 위압감을 주긴 했지만, 그의 육신은 이제 늙고 병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오시마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내게 오시마는 늙을 수 없는 사람으로 기억됐었다.
나는 오시마의 영화를 1990년대 중반, 지금은 사라진 서대문의 추레한 2층 골방에서 낡은 비디오로 처음 만났다. 유명한 <감각의 제국>을 그보다 훨씬 전에 순전한 호기심으로 봤지만, 서대문 골방에서 <청춘잔혹이야기>를 봤던 기억이 굳이 첫만남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주인공인 청년 기요시가 더러운 낙태수술대 위에 잠든 연인 곁에서 사과를 질겅거리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오시마는 기요시처럼 거칠고 무례하고 오만 방자한 사람이었다. 그는 낡은 일본영화, 낡은 제도와 낡은 이데올로기, 모든 낡은 것을 부인하고 공격했다. 그는 마침내 국가마저 부인하며 <교사형>을 만들었다. 심지어 “내 아이가 7살이 됐으니 난 이제 죽어도 좋다”고 말하며 그는 자신의 육신조차 낡은 것의 반대편에 봉인되기를 희망했다. 그렇게 살면서 그는 60년대 일본영화를 프랑스 뉴웨이브에 비견될 만한 영화형식의 위대한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그의 영화들은 정치영화의 전범으로 등재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그가 1980년 이후에 만든 영화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나 <막스 내 사랑> 그리고 <고하토>에선 청년 오시마의 이념적 결기와 형식적 패기의 흔적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왜 그렇게 조락했을까. 왜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낡은 탐미의 세상에 안주하려는 걸까. 단순히 시대변화 때문일까(동서양을 막론하고 60년대 세대들은 70년대에 와서 이상주의적 열정을 잃어버렸다) 아니면 종교나 권력처럼 그의 예술적 에너지를 소진케 한 다른 대상이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영화는 결국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마침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보이는 매체이기 때문일까(오시마는 조감독이 됐을 때까지도 영화를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이 점이 삶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다고 공언했던 프랑스 뉴웨이브 감독들과의 가장 큰 차이다) 오시마의 60년대 영화들을 기꺼이 경외하던 내게 그의 엄청난 조락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오시마의 영화 4편을 상영하면서 병상의 오시마와 만나기를 희망했다. 그의 핸드프린트를 찍고 그의 메시지를 비디오에 담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거절의 답이 돌아왔다. 거동조차 어려운 병든 육신을 보여주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어쩌면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20세기의 또 다른 거인이 생로병사의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고, 나는 그의 미스터리를 떠올리며, 오시마의 회고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께도 회고전 관람을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