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경기 때 광장을 뒤덮은 응원단의 붉은 물결은 ‘그림’이 되었다.
효순, 미선을 추도하고, 소파 개정을 요구하는 광화문의 촛불시위도 아름다웠다. 그 광경을 보고, 어느 신문은 시위문화가 성숙했다고 평을 했다. 시위문화가 시위대열에 선 사람과 시위를 저지하는 권력, 양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말이었다면 나도 동의하겠다. 시위라는 무리짓기 행위는 일종의 대중발언인데, 그것을 물리력으로,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힘이 있다면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화염병이 촛불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그 글을 꼼꼼히 읽어보니 그런 뜻으로 쓴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어느 신문은 이런 대중집회 장소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부모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것도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게 모여서, 언니 누나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나라의 자존과 평화를 얘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보낸 저녁은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광장을 열어두니까 이렇게 좋지 않은가(이렇게 말하는 나는 그 자리에 가지 못했다).
사이버 광장도 그러했다. 촛불시위도 인터넷사이트에 오른 제안에서 시작됐다지만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인터넷은 새로운 미디어, 그것도 쌍방향 미디어로서 그 힘을 십분 보여주었다. 정치에 무심하다고, 개인주의에 침윤돼버렸다고 치부해온 젊은이들 사이에서 수동적 관심을 넘어선 참여의 열기가 터져오른 것도 이곳이었다. 억압에 대한 두려움의 기억이 없고, 자유를 누리며 자란 덕에 권위주의를 인정 못하는 이 세대는 여기서, 억압과 싸우던 세대의 기억과 만났다. 사이버 공간에서 현실의 광장까지 연장된 이들의 연대, 이들의 대화는 막강한 여론형성, 심지어 조작의 만용까지 행사해온 기성언론조차 무장해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류승범과 공효진, 두 젊은 배우도 그 새로운 광장(현실이건 사이버 공간 속이건)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시위 스타일도 진지하지만 새롭다. 검은 옷을 입고 표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효선과 미선, 미군 궤도차량에 스러진 여중생들에 대한 애도의 뜻이라 했다. 어여쁜 두 젊은이는 상장을 달고, 흰 국화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를 맞이한 축제의 아침에 너무 엄숙한 인사를 드리는 것 아닌가, 잠시 생각하다가 얼른 지웠다. 아니다, 이것이 즐거운 축제의 뿌리이자 동력이었다.
<씨네21>에는 다른 종류의 기쁜 일이 있다. 허문영 편집장이 돌아왔다. 또, 2002 씨네21 영평상을 수상한 뒤 우리 지면에 귀한 글을 써온 영화평론가 정사헌씨가 기자로 취재진에 합류했다. 정한석이라는 본명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 작별인사를 두번씩 하려니 왠지 쑥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