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찰리 채플린은 가족들과 함께 미국을 떠났다. 미국에서 영화를 시작했고, 그 영화로 할리우드까지 빛낸 이 천재에게 미국은 입국 비자 말소라는 기발한 방식으로 추방령을 집행했다. 냉전체제 건설에 매진하던 반공의 본부 미국은 이 남자가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방식에 이름이나 색깔을 붙이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진 미국과 채플린의 결별기.
우리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미국발 블랙리스트 때문에 채플린의 영화들은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상영금지됐다. 정작 미국에선 추방 20년 뒤, 오스카 특별상이라는 화해의 악수를 창했는데 말이다. 웃음이란 그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사람들이나 웃을 수 있는 거라더니, 맞는 말이다. 그때의 사람들에겐 이런 일들이 분노를 안겨줬건만, 지금의 사람들에겐 코미디처럼 보인다.
<위대한 독재자>의 디지털 복원판의 개봉을 앞두고, 채플린 특집을 마련했다. 그런데 이건 우연도 아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이슬람 국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비자를 받지 못해 뉴욕영화제 초청에 응하지 못했다고 하니. 9·11 테러 이후 강화된 입국 심사 탓이라 한다. 이국의 미국대사관 입국 사증 심사대 앞에 선 감독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미국 관리는 말한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신원조회에 석달이 걸린다. 12월이나 돼야 결과가 나온다. 키아로스타미는 돌아선다. 내 작품이 뉴욕영화제에 초청됐소. 라고 밝히지 않았다지만 그런 건 신청서의 입국목적란에 분명히 적어넣었을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단지 예외적 특별대우를 받기 위해 따로 노력하기를 포기하고 거부했을 뿐이다. 일종의 무저항주의.
채플린에서 키아로스타미까지, 그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50년이 지나면 코미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채플린의 영화들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듯, 권력의 억압도 여전히 굳건하다. 행사되는 방식조차 이처럼 유사하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며 `적`의 응징을. 그것도 미국의 이름으로 외치는 대사 역시 구태의연하다.
찰리, 당신을 참 이상한 시간에 불러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할 일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시간은 방심할 만하면 이상해지고 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