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군생활을 보냈다. 80년대 세대의 선입견이었겠지만, 입대 전엔 흑인 병사들과 좀더 친해질 거라고 예상했다. 쑥스런 용어를 쓰자면, 프란츠 파농과 말콤X를 떠올리며 피억압자들의 연대의식 같은 걸 기대했던 것 같다. 현실은 달랐다. 못된 상관은 대개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이었다. 그중에서도 레슬러처럼 생긴 흑인 칵스 중사는 정말 악질이어서, 일과 뒤에도 카투사들만을 골라 사역을 시켰다. 반면 백인 상관은 부드럽고 공정했다.
집단적 갈등도 주로 카투사와 흑인 병사들 사이에 일어났는데, 옆 중대에선 집단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머리로야 그들의 억압적 현실이 빚어낸 왜곡된 보상심리로 이해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인종주의자로 변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흑인들의 꽥꽥거리는 말투는 물론이고 그들의 냄새, 그들이 즐겨듣는 랩도 모두 싫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피부색까지. 단 한 가지, 노는 데는 흑인들을 따를 자 없었다. 걸음걸이부터 너무나 리드미컬해 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놀랍고 재미있었다. 그들은 노는 게 어울렸고 보기 좋았다. 병장이 되고나선 착하고 춤 잘추는 언더우드 일병과 결국 꽤 친해져 같이 외출을 나가기도 했다.
세네갈과 스웨덴의 16강전을 보다가 언더우드 생각이 났다. 세네갈의 카마라가 기막힌 결승골을 터뜨리고 나서 한 짓은 감격에 겨운 골 세리머니가 아니라 관중석 앞에 가서 흑인 특유의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는 것이었다. 한국전을 제외하고 이번 월드컵 최고의 장면은, 내겐 카마라의 춤이었다. 그들은 놀고 있었고 즐기고 있었다. 스포츠가 산업화하면서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 심지어 스포츠 재벌까지 생겨났지만, 축구는 여전히 공놀이이며 그걸 능숙하고 흥겹게 즐길 때 가장 아름답다는 당연한 사실을 카마라의 춤이 상기시켰다. 월드컵은 그게 4년에 한번씩밖에 열리지 않는다는 게 아쉬운, 최고의 구경거리고 놀이다. 독일과의 4강전에서 지고나서 승자에게도 박수를 보냈던 건 그것이, 적어도 구경꾼들에겐, 경제적 이득이나 생존과 관계없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나도 광주까지 쫓아가서 잘 놀았고, 한국 사람 대부분이 잘 놀았다.
월드컵이 끝나가면서 모든 신문과 방송이 우리의 이 열광적 에너지를 국가적으로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라는 유의 말을 쏟아놓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놀거리가 빈약해 우중충하게 살던 우리가 정말 오랫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잘 놀았을 뿐인데, 그걸로 뭘 어떡하겠다는 건가. 물론 잘 놀면 남는 게 있다. 언더우드의 춤과 카마라의 춤 같은 공차기가 알게 해주는 건 놀이의 순간엔 지식과 자기 검열없이도 몸이 스스로 사회문화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이다. 놀이가 끝나면 다시 우리는 생존의 세계 그 거대한 편견의 복합체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놀이의 기억은 몸 어딘가에 남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지려면 우린 좀더 자주 그리고 잘 놀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에겐 또 다른 놀이판이 기다리고 있다. 7월11일부터 열리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다. 이다혜 기자가 훌륭하게 뽑은 제목대로 ‘열심히 응원한 당신, 부천으로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