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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2002-06-28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빈번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한테 일어났구나, 라는 짧은 감회가 스쳤고, 곧바로 한국과 이탈리아의 축구가 있었다. 떠들썩한 시간이 흘러갔고 만 하루가 지나자 그에 대한 기억들이 슬금슬금 떠올랐다. 뜻밖에 아니 당연히 나는 그를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채영주이며, 나와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20대 후반부터 소설을 썼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신문 단신란에 날 정도의 사회적 이름을 얻었으나, 내게 있어 그의 의미는 아주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잘 써서 이런저런 상을 받았던 그 친구는 무슨 이유에선지 정치학과를 택했다. 내 생각에 그는 떠돌이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성실한 대학생활을 못하다가, 4학년 때 6개월 동안 행방불명됐다. 나중에 들으니 광주에 내려가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 우리는 묻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들어 있던 노래 동아리에 그가 가입하겠다며 찾아와 능숙한 기타 반주로 폴 사이먼의 <던컨>을 불렀지만, 역시 두세번밖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백수생활 3년 만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도, 그는 걸핏하면 세상을 떠돌았고, 어느 날 밤 불쑥 내 숙소에 찾아와 너는 왜 떠나지 않느냐고 채근하기도 했다. 거지꼴로 인도를 여행하다가 죽을병에 걸려 일주일 동안 생면부지의 인도 주민 신세를 진 끝에 겨우 살아나기도 했고, 타이 여행길에 만난 싱가포르 여인을 잊지 못해 결국 그와 결혼했다. 결혼식 때는 김병익 선생이 주례를 서고 내가 사회를 봤는데, 맨 앞줄에 그다지 밝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던 양가 부모님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는 살아서 10권 남짓한 소설책을 펴냈고, 그의 성실한 독자가 아니었던 나로선 그의 데뷔작인 중편 <노점사내>만을 기억하며 그가 좋은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그의 부탁에 따라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아, 가족들끼리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마음에 오래도록 눌러앉아 있던 병이 몸으로 옮겨갔다는 상상을 한다. 병원에서도 병명을 잘 몰랐다는 병을 그는 4, 5년 동안 앓아왔고, 우리는 그를 그 기간에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대개 그렇듯 무심하고 바빴으며, 그는 너무 일찍 찾아온 깊은 병과 마주하며 별다른 위안없이 그 시간을 견뎠을 것이다. 왜 친구들에게 죽음마저 숨기려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사람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만은 아니기를 그저 빌 뿐이다.

그는 죽어 해운대 바닷가에 뿌려졌고, 이제 몇몇 사람들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다가 그 기억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작가 최인호는 그의 벗 하길종 감독의 죽음 앞에 “세월이 가면 잊혀지고 퇴색될 추억 나부랭이를 늘어놓고 싶지 않다”며, 오히려 “천국으로 가지마라. 이승에서 혼으로 방황하라”고 독하게 말했지만, 그의 작품이 얼마나 오래 기억될지 판단할 능력이 없는 나로선, 덧없는 짓이라도 해도, 그에 대한 기억 나부랭이를 이렇게 한줌이라도 더해두려 한다.

미안하다, 영주야. 그리고, 이 지면의 쓰임새를 무시한 이 글의 부적절함을 용서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