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만큼 디스토피아적인 소재가 있을까. 그런데 대다수의 재난영화는 사실 그다지 디스토피아적이지는 않다.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시종일관 디스토피아적인 상태의 불편함과 암울함을 견뎌줄 관객이 많지는 않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이들 영화가 다루는 재난은 주로 재난 자체의 기승전결 서사(敍事)를 갖는다. 임박한 파국을 예측해서 경고하는 소수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는 기존 시스템의 관성이 있다. 극의 초반기에는 답답하게도 후자의 힘이 압도적이지만, 결국 당도한 재난 앞에 전자의 예지와 역량이 빛을 발하고, 이들의 분투 덕에 재난은 ‘극적으로’ 그래서 ‘대충’ 극복되곤 한다.
이와는 다른 디스토피아적 영화의 서사는 주로 ‘재난 이후’를 소재로 삼는다. 인간이 멍청해서든 무력해서든 회복할 수 없는 재난의 결과로 펼쳐진 지옥도 위에서, 또 인간은 분투한다. 마치 재난이 소재인 듯하나 실제로는 정치가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이 새로운 ‘자연상태’에 대한 해석은 영화마다 조금씩 달라서, 토머스 홉스식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거나, 존 로크식의 ‘소박한 목가적 공동체’가 그려진다. 이 정치적 서사의 ‘결’은, 각각, 지배하는 국가의 탄생 혹은 교호하는 사회의 형성이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이 독특한 점은 이런 내러티브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화를 못 본 이들에게 스포일러가 될까봐 두렵지만, 이 영화는 재난의 서사(序詞), 즉 재난이 닥치기 전 이야기에 치중해 있다. 재난 후사가 일종의 ‘추신’(postscript)처럼 붙어 있기는 해도 그건 이미 한번 매듭지어진 사실을 재확정해주는 기술에 가깝다. 재난이 오기 전까지의 인간은 멍청하고, 재난 이후로도 결국 인간은 멍청하다. 시쳇말로 기승전 ‘멍청’이다.
사실 우리는 영화의 스포일러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것, 즉 인간은 대단히 멍청한 집단이라는 점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덜 멍청하게 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인간이 제아무리 현명해진다고 한들 재난에 철저히 대비하고 완벽히 방어할 수는 없다. 특정 재난이 지나가고 난 뒤, 그것을 예언하지 못한 제사장의 목을 치거나, 이른바 인재(人災)를 자초한 인간들을 잡아 문초하는 게 고작이다. 물론 그렇게라도 해야 성난 민심이 가라앉고 다음 재난을 그나마 덜 심각한 형태로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아둔함은 다가올 재난의 대비 여부 이전에 이미 와 있는 재난을 수긍하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의 집단적 멍청함에 대한 입장이 향후 정치의 구분점이 되어야 한다. 감히 예언컨대, 이것이 우리 인류의 재난 서사(署事), 즉 재난 대응의 정치적 결정을 가름할 테다. 그 결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다수가 죽고 일부만 살 수도 있고, 다수의 노력으로 소수의 죽음을 최소화할 수도 있다. 적어도 그 죽음이 희극적이거나 비참하지만은 않기를, 죽음의 수보다 그것을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는 삶의 수가 훨씬 더 많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