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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방향이 좋은 콘돌맨

<콘돌맨>

예로부터 만화는 SF와 거리가 가까웠던 것 같다. 한동안 영화판에서 많은 인기를 끈 초능력 영웅이 나오는 만화들은 더욱더 그랬던 것 같다. 이런 만화의 원조 격이라면 <슈퍼맨> 시리즈일 텐데, <슈퍼맨>은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 이야기니 영락없는 SF다. 흥행에 성공을 거둔 영화판 <슈퍼맨> 시리즈 세편은 SF 성격이 더욱 뚜렷하다. 1편은 멸망하는 외계 행성 이야기를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었고, 2편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다. 다른 길로 나갈 여지도 충분했던 <슈퍼맨3>조차 대단히 뛰어난 초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SF 소재가 중심이다.

그 후로 이어진 예는 대단히 많다. 출발부터 정통 SF로 시작하는 <아이언맨>은 대표 격이고, <헐크>나 <스파이더맨>조차 과학 실험을 위해 준비하던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그게 잘못되면서 주인공이 탄생했다면서 출발하는 내용이라 충분히 SF의 범위 안에 든다. 만화 산업이 미국에 비해 크게 성장하지 못했던 한국에서도 SF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우주를 넘나드는 모험담이나 로봇 친구를 만나 소동을 겪는 이야기 등은 한국만화계에 진작부터 등장했고, 1980년대 말부터 몇년 동안은 순정 만화 계통에서 외계 행성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인기를 끌어 <별빛 속에> 등 한국 만화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만화들이 폭넓은 인기를 누린 시절도 있었다.

1981년작 <콘돌맨>은 이런 만화와 SF의 관계를 중심 소재로 놓고 진행하는 영화다. 주인공부터가 아예 만화가다. 재미난 것은 만화를 그릴 때 만화에 나오는 장면이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주인공이 항상 따져보는 방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첨단 기술을 이용해 만든 온갖 특수 장비로 문제를 해결하고 악당을 물리치는 만화 속 이야기에 SF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다. 영화가 진행되면 주인공 만화가는 친구의 부탁으로 우연찮게 미국 정보 기관 일을 맡는다. 그게 발단이 되어 만화가는 미국과 소련의 첩보전 한가운데에 놓이고 일은 점점 커져간다. 이 영화는 방향 조준이 무척 잘된 편이라고 생각한다. 첩보물 중에는 얼핏 SF가 아닌 것처럼 시작했지만 첩보 활동에 사용하는 장비가 현대 과학 기술의 극단을 이용하거나 아예 미래 기술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어 SF에 슬쩍 발을 들이밀게 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007 어나더데이>에는 투명한 것처럼 보이는 색깔로 변신하는 자동차가 등장하는데, <투명인간>이 SF라면 이런 자동차도 SF 소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이 영화 <콘돌맨>에는 SF를 표현하기 좋은 만화와, 그 만화로 표현되는 SF와, 영화에서 SF와 엮이기 좋은 첩보물이 한데 모여 있다. 주인공 만화가가 첩보전에 빠지게 된다는 줄거리 방향 덕택이다.

그 덕에 이야기가 잘 진행되고 재미있을 만한 소재를 짜내기 좋게 꾸며져 있다. 주인공이 자신이 만화에서 구상한 특수 장비를 첩보 당국의 지원으로 만들어내고 그 장비를 이용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에는 어느 정도 짜릿한 맛도 있다. 방 한쪽에 엎드린 채로 설렁설렁 만화책을 넘기는 나 자신이 그 만화의 힘으로 최고의 엘리트 첩보원을 물리치는 듯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통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에 나올 법한 장비를 영화 속에서 잘 만들어 펼쳐 보인 소품팀, 미술팀의 실력도 출중하다. 아쉬운 점은 영화를 진지하게 보자고 들면 대충 넘어가는 장면이 너무 많고, 영화를 농담처럼 받아들이자니 강렬할 정도로 황당하거나 특이한 장면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일단 주인공에게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하필 정보부 요원이라는 것부터가 어째 대충 넘어간다는 느낌인데, 만화가라는 사람이 특수작전을 펼치다가 등 뒤에서 총알이 날아들고 눈앞에 기관총이 튀어나와도 그냥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외에는 딱히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어찌저찌 악당이 쏜 총알이 주인공을 다 빗나가고 주인공이 적당히 무거운 걸 휘두르면 거기에 맞아 상대편 첩보부 요원들을 물리친다. 악당들은 딱 만화에서 머리에서 별이 튀어나올 모양처럼 잘도 쓰러진다. 주인공이 만화 주인공처럼 특수 장비를 사용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지만 그 가짓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아주 재치 있는 장비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다가 잠깐 숨을 돌릴 때가 되면 최고 기술을 가진 정보부 특수요원들이 만화가가 개발한 장비에 저렇게까지 쩔쩔맬 이유가 있는가 싶다. 역시나 진지하고 아슬아슬한 느낌도, 유쾌하고 공상적인 느낌도 콕 집어 칭찬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 탓인지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요즘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대부분 좋은 기억으로 이 영화를 떠올린다. 별 기대 없이 재미난 영화 하나 보고 싶다 싶을 때, 어려울 것도 없고 무섭거나 놀랄 것도 없이 부드럽게 볼 수 있는 영화라서 나쁜 기억을 남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영화가 복잡하지 않고 어디서부터 보든 즐길 만한 형태이기에 기대감 없이 무료할 때 케이블 방송이나 VHS 비디오테이프로 보면 훨씬 나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장면 장면의 꾸밈새는 썩 괜찮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면 콘도르 모양으로 꾸민 소형 접이식 행글라이더를 등에 짊어진 사람이 에펠탑에서 뛰어내리려는 장면이 나온다. 1, 2초간 화면을 보여주면 “바로 저 사람이 콘돌맨이구나”, “배경은 프랑스 파리구나”를 알려줄 수 있고, 동시에 “저 사람은 왜 저기에서 뛰어내리려는 걸까”, “저 콘돌맨 행글라이더가 과연 성공할까” 등등 다음 장면에 대한 궁금증도 같이 던져준다. 설명해주는 대사 한마디도 필요 없다. 이렇게 화면을 구성한 것은 빼어난 솜씨에 있다. 그 밖에 거장 헨리 맨시니가 작업한 주제곡 또한 만화 같은 영화의 음악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훌륭한 곡이라는 점도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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