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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매끄러운 매닉스

사이버펑크 SF가 유행한 후부터 전자부품과 인공지능이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야기에 훨씬 더 친숙해진 느낌이다. 그렇지만 뛰어난 컴퓨터를 소재로 삼고 있는 SF로 범위를 줄여놓으면 그런 소재가 인기를 끈 것은 사이버펑크 자체보다는 한참 더 오래되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대표 SF 단편으로 자주 언급되는 <최후의 질문>이 나온 것은 1950년대다. 실험적인 디지털 컴퓨터가 처음 제품으로 나와 연구소에 팔리기 시작할 때, 벌써 컴퓨터를 다룬 SF가 인기를 끌었다.

오늘 소개할 <매닉스>(Mannix)는 1960년대 후반 제작되어 한국에서도 방영된 적 있는 미국 TV시리즈다. 내용은 그 무렵 인기를 불러모은 구식 제임스 본드 영화를 좀더 진지한 분위기로 바꾼 뒤 TV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면 어울릴 것이다. 그래도 매주 한번씩 지구를 위기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주인공의 직업이 사립탐정으로 바뀌기는 했다. 그래서 매닉스는 첩보 사건이 아니라 보통 범죄를 해결한다. 그래도 분위기는 닮은 데가 많다. 매닉스는 아무리 무시무시한 악당이 덤벼도 겁먹지 않고 언제나 여유가 있고 모든 여성 등장인물들은 매닉스에게 호감의 눈빛을 보인다.

돌아보면 멋쟁이 해결사가 나와 매주 이상한 사건을 하나씩 해결하며 악당을 퇴치한다는 TV시리즈는 할리우드에서 굉장히 흔하다. 사실은 주인공이 초능력자라든지 사기꾼 출신이라든지 심지어 악마라든지 조금씩 특징을 바꿔가면서 요즘도 비슷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매닉스> 시즌1에서는 제임스 본드 따라하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독특한 소재를 한 가지 더 집어넣었다. 그게 바로 컴퓨터다.

매닉스가 몸담은 탐정 회사는 1960년대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컴퓨터라는 첨단 장비를 설치해두고 그것을 활용해서 수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하면 컴퓨터가 사건 관련한 인물 정보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각종 자료 분석 결과를, 요즘 식으로 말하면 빅데이터 처리를 통해 도와준다. 따져 보자면 이 TV시리즈에서 최신형 제품이라고 탐정 회사 사장이 자랑스러워하는 기계는 모르긴 해도 요즘 햄버거 가게에서 감자 튀김 주문할 때 쓰는 컴퓨터보다도 성능이 한참 뒤떨어질 터이다. 그래도 거대한 방을 가득 채운 1960년대식 컴퓨터가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작동되고 그 처리 결과가 종이 딱지에 찍혀 나오는 예스러운 모습을 보면 근사한 운치가 느껴진다.

내가 생각하는 <매닉스>의 큰 장점은 이렇게 흔한 틀로 여러 범죄를 다루는 과정에서 틈틈이 당시의 사회문제를 부드럽게 엮어 다루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 알코올중독, 마약 문제, 빈부 격차 같은 그 시대 미국 사회의 여러 문제가 매닉스가 해결해야 할 범죄에 얽혀서 등장한다. 극중 매닉스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나오는데, 그 때문에 매닉스가 옛 전우를 만나는 이야기에서 참전용사의 트라우마를 다루거나 한국인 전쟁고아를 다루는 내용도 나온다.

악당이 쏘는 총알이라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항상 주인공의 심장을 꼭꼭 피해가는 분위기로 설렁설렁 진행되는 TV 오락물에 이 정도의 예리함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워낙에 이야기를 매끄럽게 잘 만들 만한 아주 영리한 제작진이 내용을 꾸미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리한 사람들의 눈에 뜨일 수밖에 없는 사회문제가 무리 없이 녹아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매닉스>가 어떤 이야기인지 좀더 소개해보자면 구체적인 줄거리를 하나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1967년 10월14일에 첫 방송된 시즌1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이번에 매닉스를 찾아온 의뢰인은 어린이다. 어린이는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보이면서 매닉스가 훌륭한 탐정이라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매닉스는 어린이가 장난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가 싶어 그냥 농담 몇 마디를 하며 돌려보내려 한다. 그런데 어린이는 매닉스에게 자신의 아빠를 구해달라고 의뢰한다. 아빠의 이름을 들어보니 며칠 후 사형 집행이 예정된 사형수다. 매닉스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매닉스는 사형수의 사연을 조사한다. 사형수는 가난하면서도 난폭한 삶을 살아온 사람인데, 더 야비한 사람에게 가정이 파괴된 뒤 그를 살인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매닉스는 정황에 약간 이상한 점이 있음을 포착한다. 아빠가 붙잡혀갔지만 의뢰인인 어린이는 할머니와 함께 전보다 더 잘 살고 있으며 얼마 후에는 훨씬 좋은 집으로 이사갈 예정이라는 설명을 주의 깊게 듣는다.

조사 끝에 매닉스는 진상을 밝힌다. 사실 야비한 사람을 살해한 진범은 따로 있었다. 진범은 야비한 사람에게 당한 어느 백만장자였다. 그런데 그 백만장자가 사형수에게 접근해 어차피 너도 그 야비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냐고 하면서 자신의 살인죄를 대신 뒤집어써주면 그 대가로 남아 있는 아이에게 막대한 돈을 주겠다고 거래한 것이다. 이러한 사연이 다시 알려져서 사형수는 감옥에서 나오는데, 그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매닉스를 만나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그리고 누가 살고 싶다고 했냐면서,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냐며 소리 지른다. 그러자 매닉스는 어마어마하게 멋있는 표정으로 “내 의뢰인은 당신이 아니라 따로 있는데”라고 말한다. 잠시 후, 매닉스의 의뢰인, 그러니까 사형수의 딸인 어린이가 나타난다. 어린이는 웃으면서 아빠를 만나 반가워하고, 매닉스에게는 역시 유능한 탐정이라고 칭찬해준다. 빈털터리인 아빠는 딸을 보자 기뻐서 웃고 둘은 같이 떠나는데, 걸어가면서 아빠는 딸에게 “네가 저 탐정을 좋아한다면 나도 지금부터는 좋아할게”라고 말한다. 아빠의 그 마지막 대사는 다시 마음잡고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유쾌하게 드러난 말인 것 같아서, 나에게는 특히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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