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육아 전선에서 거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바로 TV라는 끔찍한 요물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어느 한적한 평일 오후, 아이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여보님과 나는 가나다라, ABCD가 인쇄된 학습용 출력물을 거실 벽에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반쯤은 변덕으로 벽면뿐 아니라 TV까지 출력물로 완전히 덮어버리기에 이르렀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아이가 돌아오면 바닥에 드러누워 으앙으앙 TV 틀어줘 TV 틀어줘 울며 뒹굴 줄 알았는데, ‘TV가 아파서 붕대 감아준 거야’라는 얄팍한 변명이 의외로 잘 먹혔는지 한달째 아슬아슬한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나도 더는 보고 싶은 영화를 TV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 정도? 사실 그보다 살짝 더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아이와 함께 보던 애니메이션들을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의외로 재밌었는데.
곽재식 작가님의 <모여라 꿈동산>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가만히 헤아려보면 저연령 대상 콘텐츠의 SF 비중이 은근 높지 않은가? 영상물은 물론이고,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도, 동전 뽑기 코너에도 거의 모든 제품에 조금씩이라도 SF 요소들이 스며 있는 듯하다. 최근엔 ‘코딩 병원놀이’, ‘코딩 붕어빵 가게’ 같은 정체불명의 장난감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러다 ‘마법의 AI 공주 변신 코딩 화장품 가방’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것들은 SF라기보단 과학에 가깝고, 더 정확히는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으로 대표되는 이공계 우월주의 교육의 횡행에 따른 뒤틀린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이야기 세계에서 과학은 SF로 발현되게 마련이니까.
기본적으로 유아 대상 애니메이션을 기획할 때 캐릭터 중 하나는 과학자로 설정하는 것이 일종의 공식인 듯하다. 물론 여기서 ‘과학자’란 엄밀한 의미의 연구노동자라기보다는 과학자 겸 발명가 겸 엔지니어 겸 천재적인 지능을 가진 만능 캐릭터지만. 대표적으로는 <뽀롱뽀롱 뽀로로>의 에디를 들 수 있겠다. 지능이 증강된 반(半)인간형 동물들의 극지마을 생존담인 이 시리즈에서 과학자 포지션을 담당하는 에디는 수영을 못하는 콤플렉스를 스마트 잠수복으로 해결하고, 몸치를 기계 신발로 극복하기도 한다. 수차례 실패를 거듭하며 우주선을 발명하는 에피소드가 연작으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외계인을 만나기도 하고. 제작진은 에디 캐릭터를 적극 활용해 과학 만능주의의 낭만을 재현한다. 어쩌면 많은 아이들이 에디를 통해 과학자의 꿈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대개 이런 과학자 캐릭터는 서브 포지션을 맡는다는 점이다. 낙천적이며 사교적인 주인공 옆에서 안경을 쓱 올리며 백과사전처럼 지식을 읊거나 적당한 발명품으로 깐족대는 정도의 역할인 것이다. 이 관계성이 너무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서 조금 씁쓸해지곤 한다.
<냉장고 나라 코코몽>은 특이하게도 주인공이 발명가 캐릭터를 맡았다. 물론 발명은 뒷전이고 사교성과 낙천성이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긴 하지만. 이 시리즈는 제목처럼 음식이 테마인 작품인데, 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주인공 코코몽이 사는 마을에 악당 세균킹이 음모를 펼쳐 건강 문제를 일으키고, 코코몽과 친구들은 문제를 해결할 몸에 좋은 먹거리를 찾아나선다. 이 과정에서 극적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거대 로봇 대결과 현란한 발명품들이 동원된다. 캐릭터들이 귀엽고 재미있긴 한데 악역의 악행에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탈것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애니메이션은 좀더 본격적인 SF다. 미래 도시를 무대로 자율주행 인공지능이 내장된 각종 교통수단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꼬마버스 타요>의 배경인 근미래 서울은 <스타트렉> 시리즈에 비견될 정도로 흥미로운 유토피아다. 꼬마 버스로 태어나 학습하며 어른 버스로 성장하는 과정도 흥미롭고, 이 도시에 적용되는 동물권과 로봇권 규정도 매우 선진적이다. 이들이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공동체 정신을 가진 점은 말할 것도 없다.
<로보카 폴리>처럼 조금 더 고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들 속 주인공들은 인간에게 배움받는 수준을 넘어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이상적인 정의로움을 눈앞에 구현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치트키인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 등이 주인공을 맡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 뒤 도덕과 규칙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떠난다. 다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매회 위기-출동-액션-해결의 구조를 띠다 보니 지나치게 자극적인 면이 있다. 겉보기엔 귀여운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지만 스토리 구조는 싸우는 소년 만화에 가깝다.
로봇, 탈것에 이어 마지막 치트키인 공룡 이야기. 공룡을 좋아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이들은 참 공룡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작품이 공룡을 한번쯤은 자신들의 작품에 섞어보곤 한다. 심지어 로봇이면서 탈것이면서 공룡인 <고고 다이노 공룡탐험대> 같은 작품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친구 코리리>가 재미있었다. 유치원을 배경으로 인간과 공룡이 함께 생활하는 일상 이야기인데, 부모 세대를 배려한 것인지 90년대식 개그 코드가 곳곳에 포진되어 무척 즐거웠다. 아,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엄마가 발명가로 등장한다.
한동안 아이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보며 문득 묘한 생각을 했다. 작품 속 캐릭터들이 사는 세계는 일종의 SF적 유토피아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배려와 양보, 높은 수준의 공동체 정신을 체화해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것이 옳고 교육적인 방향이라 우리 사회는 암묵적인 합의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적어도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그런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