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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지휘하는 미국인 피터 스칼렛
2002-05-15

“디지털의 등장으로 보존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다”

지난해 초에 프랑스의 유서깊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그 대표격인 총감독(general director)으로 미국인인 피터 스칼렛을 내정한 것은 프랑스 내에서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창설자인 앙리 랑글루아의 이름 탓에 세계영화사에서 거의 일종의 ‘성소’(聖所)처럼 여겨지던 이곳의 운영을 미국인이 맡게 된다는 것은 많은 프랑스인들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일로 비쳐졌던 것이다.

하지만 피터 스칼렛은 19년간 샌프란시스코영화제를 운영하면서 세계 각국의 새롭고 실험적인 영화들을 미국 관객에게 소개함으로써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은 바 있는 인물이다. 특히 대중성이 없는 프랑스영화들, 가령 필립 가렐이나 자크 리베트의 영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해 프랑스 내에서도 많은 지인을 얻었고 그리하여 1998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특별공헌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달에 서울에서 열린 국제영상자료원(FIAF) 서울 총회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대표로 참석한 이 ‘파리의 미국인’을 만나보았다.

지난해에 당신이 시네마테크의 책임자로 내정되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했다. 시네필이 가장 많은 나라인 프랑스에서 시네마테크의 대표 자리를 외국인에게, 그것도 미국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이하게 비쳐졌다. 왜 당신을 택했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 우선은 내가 샌프란시스코영화제를 19년간 이끌어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영화계 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점도 아마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지지난해에 시네마테크를 둘러싸고 프랑스영화계 내에서 내분이 있었고 이러한 갈등을 어느 정도 무마하면서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외부의 인사가 더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디든 파벌은 있게 마련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프랑스영화계의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려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이다. 물론 이건 짐작이다. (웃음) 아무도 내가 선택된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파리에 와서 일을 시작하면서 느낀 인상을 말한다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상당히 큰 조직이다. 프로그래밍, 자료 보존, 서적 출판,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80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상영작 프로그램이 나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개 상영관의 프로그램을 네명의 담당자가 커버한다. 다른 부문은 나에게도 새로 접하는 부문이므로 나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불어를 꽤 하는 편이긴 하지만 역시 외국어인 셈이어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의 영화문화가 미국과 다른 점을 많이 발견했으리라 생각되는데.

현재 미국의 경우 영화의 문제는 거의 100% 박스오피스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떤 영화가 좋냐 나쁘냐 하는 문제 자체도 흥행성적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프랑스가 세계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인들은 영화를 정말이지 중요한 것,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때로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영상자료의 보존이 오래 전부터 제도적으로 정착된 편이라 큰 문제가 없는 편이지만 아시아 지역은 그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비교적 필름보존의 역사가 오래된 편인 일본만 해도 2차대전 이전의 영화는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은 편이다.

이미지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총회에서도 인도네시아의 오래된 필름들이 예산 부족으로 많이 훼손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나는 두달 전에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 그곳의 필름 보존 상태를 둘러보고 왔지만 대단히 상황이 좋지 않아서 굉장히 놀랐다.

아프가니스탄에 가게 된 것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나.

아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창설자 앙리 랑글루아는 필름은 무슨 수가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관철하려 했다. 그의 태도가 나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도록 했다. 탈레반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영화 유산을 파괴하고 있고 예전의 스튜디오를 지하드 뮤지엄으로 개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미지가 없다면 국가도, 민족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프카니스탄의 이미지를 보존하는 것은 오랜 전쟁으로 참혹하게 파괴된 이 나라를 살리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전쟁에 시달린 그곳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채플린,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 <하얀 풍선>(자파르 파나히 감독) 등 20편의 영화테이프 그리고 소형 소니 프로젝터를 함께 가지고 갔다. 막상 가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전쟁의 상처가 많이 남아 있고 전후 재건작업이 아직 궤도에 오르지 않아 아직도 모든 면에서 불안정한 편이었다.

그곳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채플린의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반응은 상상을 초월한 정도였다. 교사는 아이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하더라. 참혹한 상황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 그래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내게는 참으로 벅찬 감동이었다. 시내 극장에서도 내가 가져간 테이프를 상영했는데 그곳의 성인관객도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관객 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재미있는 미국영화는 없냐”고 물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사람에게도 오락영화의 표본은 역시 미국영화였던 것이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으로 간다는 얘기를 듣자 나와 절친한 사이인 도큐멘터리 감독 레흐 코왈스키(Lech Kowalski)가 나와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찍은 필름들을 현재 편집중인데 이 영화의 가제는 <카불의 채플린>(Chaplin in Kabul)이다.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영화광이었나? 영화와 처음 관련을 맺게된 계기를 말해달라.

영화를 하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저 평범한 영화관객에 지나지 않았다. 1966년 대학을 졸업한 나는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때 뮌헨에서 파리까지 히치하이킹을 해서 갔는데 도중에 만난 어느 프랑스인이 내게 파리에 가거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라는 곳에 들러보라고 권했다. 시네마테크가 뭔지도 모를 때였으니까 앙리 랑글루아 같은 사람의 존재는 전혀 모를 적 이야기다. 파리에서 별 생각없이 사람들에게 물어 시네마테크를 들렀다. 내가 들어갔을 때 상영중인 작품이 푀이야드의 <판토마> 중의 ‘보석강도’편이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놀랄 만큼 환상적으로 처리하는 푀이야드의 수완에 완전히 몰입되어버렸다. 1910년대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난 뭔가 영화에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에 마침 영화일을 하는 친구가 있어 그의 소개로 소규모 프로덕션에 들어가 도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참여한 작품 중에 나중에 유명해진 작품에는 짐 맥브라이드가 감독한 ‘페이크 도큐멘터리’의 고전 <데이비드 홀즈만의 일기> 같은 것들이 있다. 그 당시 우리 사무실의 건너편 사무실도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 사무실에 뉴욕대학에서 가장 광적인 시네필이고 괴짜라고 평판이 나 있던 젊은이가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작자는 그의 지도교수라고 했다. 그 친구의 이름이 마틴 스코시즈였다. 그때 준비하던 작품이 바로 그의 장편데뷔작이 된 <내 문을 두드리는 자는 누구인가>였다. 그와는 지금도 절친한 사이이다.

샌프란시스코영화제는 미국의 영화제 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영화를 선호하는 영화제로 꼽힌다. 아마도 그것은 당신의 취향 탓인 것 같기도 한데….

80년대 이후 미국 관객의 외국영화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고 있다. 특히 좀 어렵다고 평판이 난 영화감독들의 경우는 아주 극소수의 관객밖에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상영작을 선정할 때는 미국에서 비교적 소개되지 못했던 감독들 예를 들면, 마뇰 드 올리베이라나 요타르 이오셀라니 같은 감독들이 얼마나 뛰어난 감독들인가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상을 제정해 수여한 것도 중요한 외국작가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로베르 브레송, 우스만 셈벤,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뇰 드 올리베이라, 키아로스타미 등이 이 상을 받았으며 한국의 임권택 감독도 역대 수상자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영화제에서 손을 떼고 났더니 이 상을 올해는 워런 비티에게 주겠다고 하더군. 떠난 내가 가만히 있어야지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웃음)

19년간 영화제의 운영경험을 돌이켜볼 때 지금도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작품의 질에서 전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숫자를 거의 세배가량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잘한 부분도 있겠지만(웃음) 샌프란시스코란 도시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하다는 점, 그래서 미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코스모폴리턴한 분위기가 상당히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등장은 영화상영뿐 아니라 그 보존의 문제에도 그 파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등장이 이미지에 대한 감수성을 둔화시키고 있다는 논의들이 많다. 가령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필름과 비디오의 차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할 정도라는 탄식도 있다. 하지만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반드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 갈 때도 소형 프로젝터를 가져가서 영화를 보여줄 수 있었는데 이것만 해도 테크놀로지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예전 같으면 크고 무거운 영사기를 가져가야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디지털의 등장으로 누구나 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아카이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보존해야 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랑글루아는 모든 이미지는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30, 40년대에 쓰레기로 치부되던 영화들을 보존함으로써 이 영화들이 나중에 중요한 업적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랑글루아의 입장을 완고히 견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거의 모든 것을 보존해야 된다는 것인데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문제가 될 것 같다. 앞으로 고민하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랑글루아 덕에 영화에 입문하게 된 사람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가 상영해준 푀이야드가 바로 결정적인 ‘영화체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 35년 뒤에 이제 내가 그의 자리에서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에서 일하면서 내 인생이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커다란 사이클을 이루고 있구나 하는 감개를 느끼기도 한다.글 임재철/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