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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어버린 소년, <킬러들의 수다> 원빈
사진 이혜정황혜림 2001-10-10

믿고 싶어도 차마 믿기 어려운, 혹은 직면하기엔 왠지 멋쩍은 ‘생짜’ 순수의 표정을 이처럼 천연덕스레 담기가 어디 쉬울까. “사랑이란 그런 거야! 한없이 영롱하고 투명한 거야. 그 투명함은… 어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도 다 이길 수 있는 거야!” 죽여야 할 임신부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정우를 옹호하며, 대책없이 순진무구한 사랑론을 펼치다 눈물 그렁해지고 마는 킬러들의 막내 하연. 어이없는 웃음을 삼키느라 애쓰는 형들의 뒤통수에, 스스로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는 하연의 풍경은 <킬러들의 수다>가 발산하는 독특한 엔도르핀의 절정부다. 과장법이 분명한데도 조소보다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명료한 순수함은, 원빈이 아니었더라면 색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살짝 뻗은 곱슬한 머리칼 사이로, 동화에서 빠져나온 몽상가의 눈빛을 하곤 킬러보다 사악한 세상에 쉼표를 찍는 그 표정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말로는 정말 설명 못하겠어요. 몸으로는 알겠는데….” 안해 본 캐릭터라는 점에 끌렸지만, 하연은 영화를 끝낸 지금도 원빈에게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인물. 원빈의 8할을 키운 드라마 <꼭지>의 명태에게도, <가을동화>의 태석에게도 순정은 있었지만, “좀 뚱하고, 생각 끝에 간신히 한마디 하는” 하연과는 방식이 달랐다. “명태나 태석이나 시원시원하잖아요. 하고 싶은 말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게 아니니까 스스로 답답했죠.” 강원도 정선 여량의 시골에서 자라선지 명태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 같다며, “정말 내 안에 하연 같은 모습이 있을까” 의문스러웠다지만, 그는 새로운 얼굴의 가능성을 봐준 장진 감독이 고마운 눈치다. 자꾸만 튀어나오는 명태나 태석의 힘을 빼고 하연이 되기가 힘들었다면서도, 스크린에서 낯선 자신을 본 신기함을 얘기하는 표정이 투명해진다. “시사회 보면서 나 안 같았죠. 스크린 속에 내가 있는 것도 처음이고.” 그렇게 처음 마주한 하연과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그는 모처럼 말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원빈은 그닥 ‘수다’스런 편이 아니다. 내레이션을 제외하면 말수가 적은 하연처럼, 말에 앞서 한번 더 생각에 잠기곤 하는 품새가 또래 스타들의 경쾌함과는 또 다르다. 고교 졸업 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로 올라와서 “맨땅에 헤딩”하고, 촉박하게 대본을 받아 소화해야 하는 TV의 토양에서 부족한 기본기를 쌓기 위해 “유독 예민”해지곤 했던 경험 때문일까. “아직도 멀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도 힘들었어요. 스타는 길지 않잖아요, 배우는 길게 갈 수도 있고. 무기는 연기력이겠죠.” 드라마에서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매력도 떨어지지 않겠냐며, 재차 배우라는 먼 길을 되새길 줄 아는 시작. 당분간은 이날 밤새 촬영한다는 잠뱅이 광고와 드라마에서 보겠지만, 그는 미더움에 기대하게 되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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