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족의 후예답게 새하얀 피부, 부서질 듯 섬약한 눈동자, 내 의지대로 세상을 헤쳐나가겠다는 오만한 턱선을 가진 영국의 장미. <전망좋은 방>(1986)에서 헬레나 본햄 카터는 치렁치렁한 머리와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섬세한 오만함과 사랑스러운 건방짐을 동시에 갖춘 귀족 아가씨의 아이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혹성탈출>은 코르셋을 잠재우려는 꽤나 극단적인, 최후의 시도였다. 그러나 난 약간 사도마조히즘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코르셋의 구속에선 벗어났지만, 여전히 머리와 얼굴을 압박당하고 있으니까.” 이 뼈있는 농담 속엔 그녀의 이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1985년, 영화 데뷔작 <레이디 제인>을 본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전망좋은 방>에서 오만하지만 사랑스러운 귀족 아가씨 루시 역에 그녀를 기용했다. <전망좋은 방>이 아카데미 8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등 성공을 거둔 뒤, 그녀는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케임브리지대학을 떠나 본격적인 연기자의 꿈을 펼쳤다. 그러나 시대극의 그림자가 어딜 가든 따라붙었다. 고전적인 마스크가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오필리어에서 올리비에로, 시대극에서 시대극으로, E. M. 포스터에서 셰익스피어로. <모리스>(1987), <햄릿>(1990), <하워즈 엔드>(1992) 등을 거치며 배우로서 한계에 이른 게 아닐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대극의 울 안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영국의 장미’는 ‘미국의 여피’로 외도를 감행한다. 우디 앨런의 <마이티 아프로디테>(1995)에서 아기를 낳기는 싫지만 키우고 싶어 입양하는 화가 아만다 역은 작은 변신이었다. 그러나 시대극은 헬레나 본햄 카터를 원했고, 그녀는 케네스 브래너의 <십이야>(1996), <도브>(The Wings of the Dove·1997) 등 시대극의 아이콘 역할을 계속했다. <도브>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