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두번의 일식이 있던 어느 여름, 매력적인 소녀 시빌(니노 쿠카니제)이 방학을 맞아 시골 마을로 찾아든다. 동갑내기 소년 미키(샬바 야쉬빌)는 시빌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지만, 시빌은 미키의 아버지 알렉산드르(예브게니 시디킨)에게 빠져 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소문과 달리, 마을 여자들과 마음껏 즐기는 알렉산드르를 보면서 시빌은 육탄 공세를 시작하고, 미키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Review “그 여름 시빌한테 73번의 키스를 했다. 100번의 키스를 허락받았지만…. 27번의 키스는 못다한 채 남겨두고 말았다.” 이제 막 변성기를 맞은 듯한 소년 미키의 새된 목소리가 영화의 문을 연다. 못다한 키스에 대한 아쉬움이, 놓쳐버린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걸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사랑 이후, 그가 부쩍 키자람을 했으리라는 것도. <못다한 27번의 키스>는 아직 첫사랑의 신열을 간직하고 있는 소년이 털어놓은 어느 여름의 기억, 그 성장의 기록이다.
아버지의 여자와 아들의 여자가 동일인물이라는 설정은, 거대한 비극을 잉태하게 마련이다.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 <페드라>의 아들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아들의 여자를 사랑한 <데미지>의 아버지는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못다한 27번의 키스>의 비극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소년이 이런 삼각구도를 ‘상상’한 데서 비롯된다. 소녀는 소년에게 난데없는 ‘배앓이’의 충격을 선사하며 그의 인생에 뛰어들지만, 이미 소년의 아버지에게 마음을 빼앗긴 뒤다. 소년의 아버지는 천하의 바람둥이지만 아들이 사랑하는 소녀를 여자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아들은 자신의 연적인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아버지를 부정하자, 사랑도 그를 부정한다. 항상 출항을 준비하는 낡고 녹슨 배의 선장 네모의 말처럼, “사람도 떠나고 바다도 떠나고, 그게 바로 삶”인 모양이다.
소녀로 인해 인생이 뒤바뀌는 건 소년뿐이 아니다. 소녀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파하고 다니는 <초콜렛>의 줄리엣 비노시를 닮아 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소녀 시빌은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의 잠든 열정을 흔들어 깨운다. “나쁜 피”가 흐른다고 소녀를 손가락질하던 그들은 스탈린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기록영화 대신 <엠마누엘>을 보러 은밀히 몰려든다. <엠마누엘>이 상영되던 밤, 연로한 교장은 불어 선생의 침대에서 복상사를 당하고, 난봉꾼 피에트르는 볼베어링을 낀 채 섹스하다 봉변을 당한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숲 속 작은 마을은 돌연 ‘사랑과 성’에 조급증을 내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시대와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억눌린 시대 억눌린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소녀 실비뿐 아니라, 네모 선장의 캐릭터에도 투사된다. 배 띄울 바다를 찾지 못한 선장은 트랙터에 배를 싣고 다니는데, 그가 찾는 바다는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 실비가 네모의 배를 타고 바다 멀리 사라진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못다한 27번의 키스>는 구소련에 속해 있던 작은 나라 그루지야 공화국에서 날아온 ‘사랑에 관한 동화’다. 그루지야 공화국 출신인 감독 나나 조르자제는 건축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79년 감독으로 데뷔했고, 87년 칸영화제에서 <나의 영국인 아버지>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2000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이며,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