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비싼 판타지들과 깡패친구들의 대수롭지 않은 무용담이 온 극장가를 도배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감독 아녜스 자우이- 최근 서울에서 회고전이 열렸던 알랭 레네 감독의 <스모킹/노 스모킹>(1993) 각본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 의 데뷔작인 <타인의 취향>은 개봉관들의 상영작 목록을 뒤지며 한숨짓는 이들에겐 작은 선물과도 같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취향>은 클로드 소테의 영화- <즐거운 인생>(1970), <금지된 사랑>(1992) 등이 비디오로 출시되어 있음 - 이후 오랜만에 보게 된 만족할 만한 프랑스산 멜로드라마였다. 프랑스에 모던한 작가영화의 전통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클로드 소테는 그러한 전통으로부터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감독이지만 비관습적인 상황묘사나 모더니스트적 전략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도 탄탄한 각본과 감정의 결을 따라가는 정확한 연출로 독특한 멜로드라마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짜임새 있고 유머러스한 각본과 배우들의 연기력을 바탕으로 연출력의 과시없이 드라마를 이끌어나가는 아녜스 자우이는 소테와 유사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타인의 취향>은 위에 언급한 소테의 영화들보다 훨씬 풍성한 유머를 담고 있으며- 보도자료에 인용된 바 ‘우디 앨런적 코미디’라는 말이 꼭 과장이라고 볼 수 없다- 영화 속에 묘사되는 인물 군상들도 좀더 다양하다. 이런 점에서 앞에 요약해놓은 줄거리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영화는 크게 세명의 남자와 세명의 여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소기업 사장인 카스텔라, 그의 보디가드 프랑크, 운전기사인 브루노(알랭 샤바), 카스텔라의 아내이며 인테리어 코디네이터인 앙젤리크, 연극배우인 클라라, 그리고 술집 바텐더이며 때로 마약거래를 하기도 하는 마니(감독 자신이 이 역을 맡아 연기한다). 영화는 이 여섯 인물들간에 벌어지는 여러 소소한 갈등관계들을 놓치지 않고 차분히 따라간다. 그러나 감독이 이런 관계들만을 좇는 데 만족했다면 <타인의 취향>은 단지 이중으로 겹쳐놓은 삼각관계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의 또다른 미덕은 중심인물들의 삶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변인물들과 주인공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 속까지도 꼼꼼히 파고들어가 씁쓸한 웃음을 길어올리는 데 있다. 이것은 <맨해튼>(1979), <한나와 그 자매들>(1986)과 같은 영화를 통해 우디 앨런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미덕이다.
인물들간의 관계망 속에서 모든 것은 제목 그대로 ‘취향’의 문제이다. 취향의 차이가 오해와 갈등을 낳는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오해와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에 이르는 길이라는 식의 손쉬운 (하지만 믿기 힘든) 해결책에 의존하진 않는다. 설령 이해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러나 이해는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타인과 맺는 가능한 여러 관계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는 문제가 남는다. 감독은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편안한 결말 대신 인물들이 보여주는 여러 선택의 양상들을 제시하면서 해석의 틈새를 열어놓는다(우디 앨런은 스티그 비에르크만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나와 그 자매들>의 결말을 너무 ‘깔끔하게 정리’해버린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털어놓은 바 있다. <타인의 취향>은 <한나와 그 자매들>과 같은 앙상블 드라마이지만 결말 처리에서는 좀더 매력적이다). 그들은 다시 만나거나- 카스텔라와 클라라-, 서로 머뭇거리거나- 프랑크와 마니-, 영영 헤어질- 브루노와 그의 여자친구- 수도 있는 것이다. 끝내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며 타자와 세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앙젤리크와 같은 인물만이 선택의 가능성마저도 갖지 못한다. 남편과 다툰 뒤 뛰어다니는 개를 바라보며 ‘위선이나 죄를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는 앙젤리크에게 브루노가 던지는 말(“디즈니랜드에나 가보시죠”)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위선이나 죄를 알며 따라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행복의 가능성 또한 가질 수 있다는 인식. 애인이 자신을 버렸음을 인정하고 합주단에 섞여 에디트 피아프의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의 변주곡을 연주하는 브루노의 모습은 앙젤리크와 정말 대조적이다.
<타인의 취향>에 나오는 몇몇 영화적 장치들을 눈여겨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가령, 극중에서 클라라가 여주인공을 맡아 연기하는 두개의 연극- 라신의 <베레니스>, 입센의 <헤다 가블러>- 이라든가 앙젤리크가 보는 TV드라마 등이 주인공들의 성격 및 심경변화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구성상의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장치들을 활용하는 데 감독 아녜스 자우이는 오래 몸담았던 연극계에서 얻은 자양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타인의 취향>의 재미는 각본에서 나온다고 말해야 옳다. 특히 카스텔라가 클라라의 예술가 동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들은 서로 ‘취향’이 다른 이들이 만났을 때 생길 수 있는 몇몇 우스운 상황들을 잘 묘사해내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대사와 연기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때를 잘못 맞추어 개봉되는 영화라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타인의 취향>이 최근 개봉작 가운데 드물게 보는 서늘한 미풍 같은 영화인 건 사실이다. 스크린상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인물들을 보며 한여름 더위를 잠깐 피해보겠다는 것도 취향이라면 취향이겠다. 하지만 우리네 삶과 사랑의 몇몇 우스꽝스러운 면모들을 적나라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심스레 한겹쯤은 들춰보이는 영화를 보며 잠시 서늘한 웃음을 지어보는 것도 과히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출연배우들 그들을 키운 건 8할이 연극
<타인의 취향>은 배우들의 호연이 인상적인 영화다. 하지만, <타인의 취향>을 연출한 아녜스 자우이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우리나라 관객 대부분에게 낯선 이들이다. 본디 연극으로 출발한 아녜스 자우이와 장 피에르 바크리는 1991년 그들이 직접 집필하고 출연한 연극을 통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1993년에는 알랭 레네 감독의 기이한 ‘짝패’영화 <스모킹/노 스모킹>의 각본작업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타인의 취향> 각본 역시 이들 파트너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으며 장 피에르 바크리가 극중 카스텔라 역을, 아녜스 자우이가 마니 역을 맡아 직접 출연도 한다. 특히 자우이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2001년 세자르영화제 여우조연상까지 수상하였다(<타인의 취향>은 작품상, 각본상, 남우조연상(제라르 랑뱅), 여우조연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극중 연극배우 클라라 역을 맡은 안 알바로나 앙젤리크 역을 맡은 크리스티안 밀레는 프랑스인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배우라고 하는데 알바로의 경우 영화 속에서처럼 실제로 오랫동안 연극계에서 활동해왔다고 한다. 단, 기억력이 좋은 관객이라면 극중에서 운전기사 브루노 역을 맡았던 배우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몇년 전 우리나라에 개봉된 <디디에>(1997)에서 사람이 된 개 ‘디디에’ 역을 참으로 ‘개처럼(?)’ 연기한 바 있는 알랭 샤바이다. 그는 이 영화의 연출을 겸하여 세자르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타인의 취향>에서 알랭 샤바는 <디디에>에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