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뮌헨에서 의대를 다니던 유능한 학생인 파울라(프란카 포텐테)는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저명한 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파울라는 해부대 위에 전에 만난 적 있는 청년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워한다. 그녀는 별안간 해부 대상이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난 청년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그러면서 이곳 해부학 실습실에 사악한 기운이 서려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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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에게 해부학 실습실이란 음산하고 또 불쾌한 곳일지 모르겠지만 야심만만한 의대생인 파울라에게는 ‘탐구의 공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녀에게 인체를 해부할 기회가 더 주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왕성한 학습욕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자기 앞에 놓인 ‘실습 대상’이 해부를 위해 ‘제조’된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때의 얘기다. 파울라는 자기 주위의 어떤 시스템이 실습 대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아낸다. 이때부터 해부학 실습실이란 일상적인 공간은 공포스런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일종의 ‘메디컬 호러’라고 할 독일영화 <아나토미>는 폐쇄적인 해부학의 공간 뒤에 숨은 거대한 악의 실체를 짚어낸다. 주인공인 파울라가 대면한 그것은 ‘반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의 비밀조직이었다. 영화 속에서 의사(擬似) 역사성을 부여받은 그 조직은 살아 있는 환자들을 ‘실험’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류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파울라는 ‘반히포크라테스’의 그런 위험한 신념에 경악할뿐더러 게다가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조부가 과거에 그 조직의 중요 멤버였다는 사실에 둔중한 충격을 받는다. 이 지점에 오면 우리는 당연히 <아나토미>라는 영화가 그 정체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한다. 이건 의학발전과 생명윤리의 함수관계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앞선 세대의 악몽에 대한 것이 되리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실 그런 우리의 성급한(?) 기대를 <아나토미>는 거의 무시하는 편이라고 말해도 된다. 영화는 그런 대로 흥미로운 악의 결사체를 보여주고는 도대체 이걸 스토리 안에서 어떻게 써먹어야 좋을지를 도통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히포크라테스’는 영화 중반쯤에 어눌하게 언급되는 듯하더니 그만 흐지부지 사라져버린다. 대신 전반부에서 정교하게 공포의 분위기를 묘사해왔던 영화는 이제 악한에 의해 위험에 빠진 파울라의 사투기에 전력을 집중한다. 그런데 불만인 것은 후반부의 이 대결구도가 볼품이 없게 짜여져 있다는 점이다. 악한의 정체는 비교적 일찍 드러나는데 그뒤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란 게 일어나질 않는 것이다. 영화 말미에 파울라는 “진부해”(corny)라고 말하는데 이건 꼭 그간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정직한 총평처럼 들린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