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로 만나 생의 달고 쓴 굽이굽이를 함께 해온 남녀의 지난한 세월. 영화는 그것을 ‘우정세월’이라 이름하며 회고한다. <우정세월>을 이끄는 것은 우연히 산계를 만난 아지의 남동생 영오의 회상. 기억속 주인공들은 앞집 형 산계와 누이 아지이다. 허름한 홍콩 아파트 동네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번번이 피로 얼룩지며 성사되지 못한 결혼식까지, 이들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을 맺어낸다. <우정세월>은 이 사연을 다소 가볍게 훑어나간다. 영오라는 제3자의 시점을 통해, 그리고 시간의 간격을 둔 회상에 의지해 <우정세월>은 비장한 홍콩누아르를 로맨틱 코미디 터치로 그려낸다.
어느덧 홍콩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버린 다닥다닥 붙은 서민아파트는 이 영화에서도 중요한 배경으로 나온다. 이 아파트에서 문을 마주하며 자라난 소년소녀의 가난이라는 공통적인 태생은 커서도 서로에 대한 애정의 밑바탕에 문신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소녀의 집안사정을 다 아는 소년은 클럽걸 출신이라는 비난에 맞서 소녀를 감싸안을 수 있으며, 소녀 역시 살인자가 되기 이전 소년의 정을 커서도 기억한다. 아파트 옥상에서 소년이 배우 흉내를 내며 소녀를 즐겁게 하는 장면은 누구에게나 아련한 어린 시절의 한토막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련함과 코믹함을 적절히 섞은, 섣불리 울음을 보이지 않는 정조로, <우정세월>은 만남과 헤어짐이 질곡을 이루는 이 두 남녀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담아낸다. 가진 것 없이 껄렁한 깡패로 나오는 진소춘과 앳된 여주인공 양영기의 연기 또한 이에 어울린다. 그러나 현재시점으로 돌아간 극의 후반부는 억지스럽다. 흩뿌려놓은 낭만적 추억이 엉킨 매듭처럼 잘 풀리지 않는 것이다.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홍콩>이 될 수도 있었던 <우정세월>은 이쯤에서 홍콩누아르의 몰락을 보여주는 또다른 물증이 되고만다.
최수임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