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UFO 떴다
누구나 다 아는 전설이 팀 버튼식으로 변하기까지
팀 버튼은 의뭉스럽다. ‘1799년 뉴욕’이라는 설명을 달아 마치 <슬리피 할로우>가 역사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양 착각하게 하지만, <슬리피 할로우>는 지상에 없다. 팀 버튼의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에 안착하지 못하듯 그는 언제나 현실 밖에 이상한 나라를 만들어왔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그 나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기폐쇄적인 세계(singular self-enclosed world)다. 마치 이미지의 독재자처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믿음대로 그 나라를 통제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그러하듯, 팀 버튼의 영화는 무엇보다 먼저 화면 그 자체를 살펴야 한다. 표면을 읽음으로써 심층을 헤아리는 게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가능하다.
스타일화한 자연주의, 모순된 세계를 찾아서
팀 버튼 사단이 다시 뭉쳐 만든 <슬리피 할로우>는 더 깊어진 팀 버튼의 비전을 보여준다. 프로덕션 디자인, 편집, 의상 부문에서 팀 버튼이 총애하는 스탭들이 참여했다. <슬리피 할로우>에는 만화와 공포 영화광으로 자랐던 그의 어린 시절, 그가 열광했던 50∼60년대 해머프로덕션의 공포 영화, 흑백 무성 영화를 향한 애정,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영향, 영화 배경과 비슷한 19세기 초 영국회화와 건축의 여운이 느껴진다. 인공의 세계가 아니라면 이 모든 것들을 담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신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팀 버튼은 영국으로 건너갔다. 애초에는 슬리피 할로우 마을이 위치한 뉴욕 북부 지방에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었지만 헌팅을 다닌 뒤 세트 작업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역사의 복원이 아니라 신비하고 환상적인 동화의 마을을 스크린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팀 버튼은 스타일화된 자연주의라는 다소 모순적인 분위기를 원했다. 팀 버튼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프로덕션 디자이너 릭 하인리히는 네델란드풍의 건축물과 영국 튜더 왕조시대의 반(半)목재 구조물을 참조해 런던 리베스덴 스튜디오 곳곳에 50개가 넘는 세트를 지었다. <칼리가리박사의 밀실> <노스페라투>의 디자인도 힌트가 됐다. 죽음의 나무가 서있는 숲을 짓는데만 70명이 12주를 매달릴 만큼 세트 건설은 ‘대역사’였다. 슬리피 할로우 마을은 런던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개인 소유지 20에이커 위에 건설됐다. 그곳은 원래 작은 연못과 나무들이 많은 수풀지역이였는데, 팀 버튼은 뭔가에 홀린 듯한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곳에 사로잡혔다. 실내 세트들을 ‘현실’처럼 지으려고 했다면 야외 세트장에는 연극무대의 인공성을 불어놓으려고 했다. 마을 건설에 걸린 시간은 4개월. 엔지니어, 도색공, 주형공 등 80명의 인원이 참여했다. “우리는 슬리피 할로우가 섬처럼 고립된 마을로 보였으면 했다. 사람이나 건물이나 할 것없이 두려움에 떠밀려다니는 것같은 분위기를 원했다.” 하인리히의 얘기다.
영화의 주요 촬영장이 된 리베스덴 스튜디오의 단점은 천장이 낮다는 것이었다. 제작 여건의 한계는 새로운 실험을 도발했다.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츠키가 맨 처음 착안한 조명 설계는 엄청난 광원을 뒤에서 비춰 실루엣을 강조하고 전체 조명을 가능한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현실에서처럼 모든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스튜디오 천장에 500개가 넘는 전구를 설치했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에 천정이 걸렸고, 이를 가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스모크를 뿜어댔다. 화면 윗부분에 얇게 퍼진 스모크는 환타지의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디지탈보다 장인의 손맛이 좋다
팀 버튼과 루베츠키는 야외와 실내 세트의 경계를 지우려고 했다. 안은 밖을 동경하고, 밖은 안을 동경하는 꼴이랄까. 이를 위해 이들은 새로운 조명장치를 고안했다. 높이 37미터, 무게 260톤의 크레인에 가로 세로 높이 20×20×12개의 전구가 달린 커다란 조명박스 3개를 매단 것이다.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UFO가 떴다고 경찰서에 신고할 만큼, 그 광량은 엄청났다. 이 조명장치는 야외 세트장을 실내처럼 만들어버렸다. “<슬리피 할로우>는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가 전형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촛불이 있다고 치자. 그럴 경우 촛불의 빛은 촛불에서 나와야 한다는 게 기본공식이지만 그걸 깨고 싶었다. 난 장면에 적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동시에 광원을 알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슬리피 할로우>에서 우리는 조명의 자유를 얻었다.”(에마뉘엘 루베츠키) 팀 버튼과 루베츠키는 필터의 사용을 자제했고 렌즈의 변화도 최소화했다. 현실의 리얼리티를 지운 것처럼 현실의 색채도 탈색시켰다. 팀 버튼은 잠시나마 <슬리피 할로우>를 흑백 영화로 찍을 궁리를 하기도 했다. 대신 칼라로 찍되 흑백의 모노톤을 유지하기로 구상을 바꿨다. 이를 위해 <가위손> <에드 우드> 등의 의상을 맡았던 콜린 에드우드는 대부분의 의상을 무채색으로 디자인했다가 나중에 은색과 몇 가지 유채색을 첨가했다.
특수효과에서 팀 버튼은 디지털의 재간보다 장인의 ‘손맛’을 신뢰했다. 그래서 그는 잘려나간 머리통과 죽음의 나무 따위를 손으로 직접 빚게했다. 죽음의 나무는 폴리에틸렌을 조각한 뒤에 나무껍질과 이끼, 나뭇가지들을 덧붙여 완성했고, 다른 나무들은 윈저 그레이트 공원의 참나무를 거푸집으로 삼았다. 잘려나간 머리는 석고와 실리콘으로 형태를 만든 뒤에 정교한 화장을 입혔고,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심었다. 눈동자와 이빨도 특별 제작된 것이다. 머리 한개를 만드는 데 무려 5주가 걸렸다. 이로써 미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아니 안다고 믿는 슬리피 할로우를 완전히 팀 버튼식으로 완성됐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팀 버튼의 노력은 집요하고 끈덕지다. 누구라도 그가 간 길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