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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1]
김혜리 2000-01-25

기괴한 고딕 호러 <슬리피 할로우>와 함게 위풍당당하게 귀환환 팀 버튼

우리 마음 속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

팀 버튼

“난 꿈은 잘 꾸지 않는다. 그저 낮 동안에도 넋이 몸을 스르륵 빠져나가 남들이 내게 하는 말이 들리지 않고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팀 버튼(42)은 그렇게 본인의 몸 안에도 다소곳이 갇혀 있지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영악한 두뇌들이 연산을 거듭해 내놓는 영화들의 각축장인 할리우드에서 <피위의 대모험>(1985)과 <유령수업>(88)으로 관객 동원력을 인정받고, 급기야 블록버스터 <배트맨>(9?)으로 흥행 감독의 왕관까지 쓴 것은 확실히 통쾌하고도 아리송한 일이었다. 더구나, 버튼의 영화에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굳이 구부리고 꺾은 자국도 거의 없다. 그의 초기 단편 <빈센트>나 <프랑켄위니>에 담긴 극히 사적인 내용과 병적인 상상력은, 상업 영화에서 도리어 더 큰 화폭과 풍성한 팔레트를 만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팀 버튼의 신작 <슬리피 할로우>에서 주인공 크레인(조니 뎁)은 영화 발명 이전에 유행했던 착시 속임수 장난감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동그란 판지 한면에는 새, 뒷면에는 새장이 그려진 이 물건을 빨리 돌리면 새는 마치 새장에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회전을 멈추면 새는 다시 창살 밖에 있다. 빡빡한 시스템 안에 있으나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 90년대 중반까지 관객의 눈에 비친 감독 팀 버튼의 처지는 꼭 그랬다.

그러나 그의 줄타기를 바라보는 구경꾼들은 “과연 언제까지?”라고 하는 조마조마함을 지울 수 없었다. 나쁜 소식은 외계로부터 왔다. 호화 캐스트에 큰 예산이 투입된 96년작 <화성침공>은 평단과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흥행이 부진하기로는 전작 <에드 우드>(94)도 못지 않았으나 <에드 우드>는 제작사 디즈니쪽에서 애초부터 버튼을 묶어두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은 작품이었기에 문제가 달랐다. 더 아팠던 펀치는 <수퍼맨>의 좌초였다. 니콜라스 케이지를 대기시킨 채 여러 아티스트들과 작업에 매달린 1년여 시간도 헛되이, 98년 5월 초 워너브러더스는 <수퍼맨>의 제작 사무실을 닫았다. 덩치 큰 프로젝트 <포스트 맨>, <스피어>가 값비싼 실패를 맛본 마당에 1억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소요될 팀 버튼의 <수퍼맨>을 밀어붙이는 것은 도박이라는 판단이었다.

<슬리피 할로우>-만화 영화+무성 영화

<슬리피 할로우>

“그 머리들 다 스튜디오 간부들 거예요. 흐흐”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뒤, 5분마다 잘린 목들이 튀고 구르는 호러 판타지 <슬리피 할로우>를 들고 돌아온 팀 버튼의 농담이다. “내가 하도 주의를 산만하게 하니까 그냥 돈을 쥐어주고 영화 찍으러 가라고 하는 것 같다”고 메이저 스튜디오와의 협력에 대해 말해온 버튼이지만, <수퍼맨> 사태에는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 리 없다. 연조가 짧은 미국 문화가 탄생시킨 최초의 괴담인 워싱톤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을 가공한 버튼의 신작 <슬리피 할로우>는 같은 원작으로 만들어진 과거 TV 영화나 디즈니의 58년작 애니메이션이 남긴 잔상을 박박 문질러버리는 강렬한 비전의 영화다. 늘 버튼의 영화 언저리에는 유황 냄새가 감돌아왔지만, 이토록 실감나게 뼈를 동강내고 피보라를 뿌리기는 처음이다. 만약 조니 뎁을 구심점으로 한 코미디가 없었더라면, 정말 팀 버튼이 무슨 분풀이를 하고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를 만큼.

뉴욕의 경찰관 이카보드 크레인은 철저히 데카르트적인 인간이다. 19세기가 코 앞인데 고문이 웬말이냐며 증거 위주의 과학적 수사를 주장해 시장을 귀찮게 굴던 그는, 머리 없는 변사체가 연달아 발견된 네덜란드계 이민들의 촌락 슬리피 할로우로 가라는 명을 받는다. 슬리피 할로우에 당도한 이방인 크레인은, 마을로 내려온 <가위손>의 에드워드가 그랬듯 주민들의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알 수 없어 곤란을 겪게 된다. 사람들은 20여년 전 독립전쟁에서 악명을 떨치다가 목이 잘린 잔혹한 독일 용병의 복수극이라고 말하지만 크레인은 믿지 않는다. 한편 관객은 크레인의 무신론과 이성 숭배가 퓨리턴 목사였던 아버지가 마녀로 의심받은 어머니를 참혹하게 죽인 어린 시절의 비극에 대한 반작용임을 일련의 플래시 백을 통해 암시받는다. 요컨대 이 괴담은 머리만 있는 남자와 머리 없는 남자의 한판 대결인 셈이다.

<슬리피 할로우>의 세계는 흡사 유럽 전래 동화에서 오려낸 삽화 같다. 이제까지 팀 버튼의 영화를 지배해 온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요소 대신 회화적 분위기가 진해졌으나, 여전히 만화 영화의 ‘육체’를 가진 실사 영화라는 점에서 <슬리피 할로우>는 <에드 우드>를 제외한 팀 버튼의 모든 전작과 피를 나눈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에서 그랬듯이 슬리피 할로우 마을의 무생물은 생물을 닮았고 식물은 동물의 형상을 본따며 사람들은 인형처럼 생겼다. 괴수의 입김 같은 안개가 휘도는 숲에서 어린아이의 앙상한 손목 같은 나뭇가지는 차양을 치고, 혈관 다발을 연상시키는 거목의 둥치는 걸쭉한 진물을 흘린다. <슬리피 할로우>는 정교한 세트와 조명, 필름을 표백하는 기교에 힘입어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뿐만 아니라 흑백과 칼라, 야외 신과 실내신 사이의 골도 껑충껑충 뛰어넘는다. 버튼의 다른 작품에서 놀러온 조각 그림들도 여기저기서 손을 흔든다. 어김없이 공동 묘지가 등장하고, <피위의 대모험>에 드러난 장난감과 기계 장치에 대한 매혹은 크레인의 요상한 수사도구들에 옮겨졌다. 계모와 숲이 나오는 이야기 설정은 초기 단편 <헨젤과 그레텔>와 겹쳐지고, 비틀주스를 닮은 호스맨은 풍찻간에 쳐들어와 배트맨처럼 동아줄을 탄다.

팀 버튼 스타일의 또다른 주요 원소는, 말보다 인물의 외모와 포즈, 동작으로 성격을 구현하는 무성 영화적 속성이다. <슬리피 할로우>에서 이는 무엇보다 팀 버튼의 잘 생긴 분신인 조니 뎁의 연기 양식에서 드러난다. 그렇지 않아도 루돌프 발렌티노나 이보르 노벨로 같은 무성 영화 스타를 빼닮은 표현력 풍부한 이목구비를 가진 배우 조니 뎁은 우아한 매너리즘 연기로 근대와 중세, 과학과 미신의 틈새에서 분전하는 만화적 캐릭터를 매끈하게 완성한다.

시대극과 호러, 핏방울 뚝뚝 듣는 입맞춤

<슬리피 할로우>

무성 영화와 애니메이션 양식에 대한 팀 버튼의 별난 애정은, 영화란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전하는 시각 매체라는 그의 믿음에서 싹튼 꽃이다. 실제로 버튼은 정해진 개념을 착착 전개하기보다, 일련의 스케치를 먼저 떠올리고 캐릭터에 흥미를 느낀 다음에야 거기서 번져나오는 의미를 생각한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그랬듯이 버튼은 관객들이 언어로 구획짓지 못하면서도 뭔가를 강렬하게 느끼도록 하는 이미지를 만들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삐죽삐죽한 망나니들이 활개치는 영화의 ‘두목’인 버튼이 돌연 코르셋과 연미복에 옥죄인 시대극 장르를 택한 점도 그러고 보면 그다지 의아할 것이 없다. 공포 영화와 나란히 시각적 형식이 내용과 분별되지 않는 장르인 시대 의상극은 어쩌면 버튼이 진작 방문했어야 할 주소인지도 모른다(팀 버튼은 <메리 라일리>의 연출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고도로 양식화된 의상과 세트 사이사이로 인물의 내면과 드라마의 핵심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이 장르는 버튼이 줄곧 건드려 온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주제를 다루기에도 적합한 무대라 할 수 있다.

<슬리피 할로우>에서 시대극은 호러 장르와 핏방울 뚝뚝 듣는 키스를 나눈다. 영국에서 촬영된 이 영화에서 한때 미국 시장까지 점거했던 영국 ‘해머 호러’(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제임스 카레라스의 해머 프로덕션이 제작한 선정적인 B급 공포물)의 영향은 특히 선명하다. 95% 세트 촬영으로 연출한 몽환적 공포나, 뉴욕 시퀀스에서 짧게 모습을 비친 ‘드라큘라’ 배우 크리스토퍼 리는 <슬리피 할로우>의 해머 호러의 인장을 눌러놓았다. 90년대 고딕 호러의 대표작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만들고 <프랑켄슈타인>을 제작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제작 지휘자의 한 사람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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