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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2] - 안제이 바이다

<판타데우스> 감독 안제이 바이다

“자유에 관한 영화가 자유를 줬다”

“폴란드 감독인 내가 지금 베를린에 심사위원으로 와 있고, 다음달엔 오스카상을 받으러 미국으로 간다. 이건 좋은 징조다.” 올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이자, 오스카 평생공로상 수상자인 안제이 바이다는, 그의 영화가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까지 관객으로 포섭해 왔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평생을, 민족과 사회에 대한 걱정에 바친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얘기에 믿음을 싣게 된다. 안제이 바이다는 자신의 레지스탕스 경험을 영화화한 <세대>로 데뷔해, 폴란드 민족진영의 주도로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를 다룬 <지하수도>, 2차대전 직후 민족 내부의 이념 갈등을 그린 <재와 다이아몬드> 등을 내놓았다. 70,80년대 사회 상황을 현실적으로 담아낸 <대리석의 사나이> <철의 사나이>도 빠뜨릴 수 없는 대표작이다.

이번 베를린영화제에 ‘오마쥬’의미로 특별 상영된 99년작 <판타데우스>(Pan Tadeusz)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문호 애덤 미키위츠의 서사시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떠날 무렵, 독립의 희망에 부푼 폴란드인들의 봉기를 그렸다. 역사물의 형식미에 주력한 나머지, 비판의 날은 무디어진 경향도 있지만, 이에 대해 안제이 바이다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시의 운율을 그대로 살린 대사, 소리와 영상의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조화, 작가의 내레이션을 곁들이는 스타일 등이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을 생각나게 한다. 폴란드에서 개봉한 지 한달 만에 400만, 최종 600만의 관객 동원기록을 세웠다.

-왜 지금 <판타데우스>인가.

=이런 영화를 연출하는 건 간단치 않다. 독일에서 <파우스트>를 만든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게다. 결정을 내리긴 더 힘들고, 기회를 마련하긴 더 힘들고. 3년 전쯤 폴란드 관객이 미국영화에 심취해 있을 때, <판타데우스>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폴란드 관객을 폴란드영화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고전 서사시를 재료로 쓴 영화를 관객이 과연 보러 올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로 매우 불안해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그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었다.

-폴란드의 성경이라는 <판타데우스>를 통해 새삼스레 제시할 비전이 있었는지.

=이 작품을 읽고 맨 처음 발견하는 건, 정체성과 자유의 소중함이다. 그 다음엔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고전극을 리바이벌한 영국영화가 자국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나. 나 역시 폴란드어의 부활에 일조하고 싶었다.

-이 영화가 당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는지.

=영화를 오래 만들었지만, 폴란드인이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는 폴란드의 역사나 사회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누군가 언젠가는 해야 할 얘기들이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짓눌린 대중에게 폴란드 예술가들은 숨통이었다. 예술 작품이 사회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무감으로 작용했고. 하지만 자유에 관한 이 영화가 내게 자유를 줬다. 정치 영화를 졸업하고, 다른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다양한 시도들 때문에 폴란드 대중이 폴란드영화로 되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소리와 영상을 결합시키는 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는지.

=매우 복잡한 과정이었다. 촬영, 연기, 음향, 편집,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야 했으니까. 스탭들에게 바로 전 촬영분을 보여주고, 준비시켰다. 어린 배우들로선 그런 연기가 많이 힘들었을 텐데, 열정적으로 잘 해냈다. 그들이 서사시의 운율에 맞춰 대사를 읊어나가자, 작품 전체가 현대적이고 리드미컬한 랩의 느낌으로 되살아났다. 결과적으로, 배우들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관객이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 틀어박혀 소일하는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해, 그들 또한 극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유럽의 감독으로서, 요즘 세계 영화의 주류인 미국영화에 대해 논평한다면.

=미국영화가 네오 리얼리즘, 뉴웨이브 등 유럽의 주요한 영화 사조를 모두 삼켜버린 것을 보면, 그들이 유럽영화를 매우 사랑할 뿐 아니라, 창작이나 감상의 태도가 매우 유연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를 만들면서 맞은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생생한 영화적 언어를 재현했을 때다. 요즘 영화는 거의 다 예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이에 가장 강력한 적인 TV를 앞지를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과감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TV와는 다른 언어로, 관객을 불러모아야 한다. 미국영화가 제시한 방법은 영화에 TV 언어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는데, 거긴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번 영화제의 심사위원이면서, 작품도 소개하게 됐다. 소감은.

=기대 못했는데, 너무 기쁘다. 폴란드 감독이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도 하고, 자기 영화도 소개하고, 미국영화제에서 주는 상도 받는다. 이건 좋은 징조다. 이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문화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유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점차 커지고 있다.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고, 정치적 입장 때문에 모국을 떠나고 하는 문제들, 다시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올 오스카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다.

=3월에 오스카상을 받기 위해 미국에 건너갈 예정이다.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영화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현역 감독에게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인생에 있어서, 내 영화 이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다. 이제 막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간 내가 이룬 성과에 대한 상이라기보다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기대에 던지는 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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