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0-01-20
- 사망1993-10-31
- 성별남
소개
펠리니는 분명 네오리얼리즘의 계보 속에서 작업을 시작했으면서도 선배들의 작품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후 이탈리아 감독들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감독이 되었다. 그의 기태적이고 화려한 내면을 탐구한 자전적인 영화들은 네오리얼리즘과 결별하고 “펠리니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이탈리아의 소읍 리미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펠리니는 그림을 잘 그리는 청년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 이곳 저곳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캐리커처와 일러스트를 그려주던 펠리니는 우연한 계기로 당시 유명했던 코미디배우 알도 파프리치(Aldo Fabrizi)를 만나면서 그의 조수 겸 개그대본 작가가 되었다. 한편으로 글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론 계속 프로덕션 스케치를 해주던 펠리니가 정식으로 영화에 눈뜨게 된 것은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펠리니는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Roma, Citt Aperta>(1945) <파이잔 Pais> 등의 영화에 조감독이자 공동 각본가로 참여하면서 영화 만들기의 기본을 익혀나간다. 영화라는 작업이 도제적 전통에 계승되는 당시로서는 펠리니 역시 로셀리니의 주요 작품에서 단순한 조감독이나 각본가의 위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각본을 쓰고 감독한 최초의 작품들- <다양한 불빛 Luci del Variet (1950, Lattuda와 공동연출) <백인 우두머리 Lo Sceicco Bianco>(1952) 등은 분명 네오리얼리즘 전통 속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선배들과는 사뭇 다른 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생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그는 많은 오해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령 그의 단독 데뷔작인 <백인 우두머리>(1952)는 개그작가이자 만화가였던 경력과 자기가 영화를 만들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토대로 만든 극히 개인적인 영화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서 엄격한 네오리얼리즘의 계승과 발전을 기대하던 동료들과의 관계도 차츰 멀어지고 말았다. 펠리니의 영화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그의 나이 서른네살에 만든 두번째 아내이자 배우였던 줄리에마시나를 기용한 <길 La Strada>(1954)이었다. 얼핏 보아 이 영화는 떠돌이 곡예사와 그에게 학대받는 어릿광대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멜로드라마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상당한 은유와 함의를 지닌 작품이었다.
그들은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이 즐겨 다루는 노동계급이나 농민이 아니라 방랑자들이었다. 펠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의 완고한 유물론적인 관점인 시대의 궁핍이나 사회제도의 해악에서 벗어나 좀더 따뜻한 인간애에 관한 성찰에 귀를 기울였다. 또한 <길>은 다른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었다. 난폭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잠파노는 다름 아닌 그의 양부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결과였으며, 젤소미나로 대표되는 백치 여성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평소 그가 인식했던 여성의 현실이었다. 펠리니는 <길>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작가적 존재를 널리 인정받을 수 있었다.
펠리니의 자전적 요소는 그의 감독 초기부터 표면과 배경에 드러났다. <길>이 떠돌이 광대에 대한 것이라면 <일 비도네 Il Bidone>(1955)는 반복되는 테마와 종교적인 상징들을 많이 담고 있다. 또한 <카리비아의 밤 Le Natti di Caribia>(1956)은 펠리니가 이해하게 된 로마 매춘부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펠리니가 자신의 작품을 ‘개인화’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의 하나는 그의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를 출연시켜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영화의 초점은 외적인 현실에서 내면의 심리와 무의식으로 점점 옮겨지게 된다. 펠리니가 항상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빈곤은 영혼의 피폐였다. 최초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처럼 비록 상황 전체가 슬프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지만, 인간 조건에 주어지는 희망은 노동계급의 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이 가질 수 있는 기쁨과 사랑, 종교적인 의식 속에 있다는 것이 한결같이 그가 주장하는 것들이었다. <길>에서부터 <카리비아의 밤>에 이르는 그의 여정은 인간적인 교감이 빚어내는 인간 영혼의 원상 복귀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960년대에 들어 그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색채가 발휘되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두편을 발표하게 된다.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1960)은 네오리얼리즘에서 훨씬 벗어나 로마의 퇴폐적이고 나태한 부자들과 이들의 생활에 최우선의 관심을 가지는 선동적인 신문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 기자 마스트로 마스트로이안니는 인생의 의미를 물음과 동시에 그 가치체계를 구하고 있으며, 시골소년으로 태어나 영혼을 모색하던 펠리니에게 친숙한 상류사회의 경험은 단테의 인페르노- 지옥과도 같은 타락이었음이 분명했다.
<달콤한 인생>은 비록 상류계급과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여전히 리얼리즘적 스타일로 속물화된 세상을 비판한다. 이어지는 <8과 1/2>(1963)에서 마스트로이얀니가 연기하는 영화감독 귀도는 펠리니를 대신해 예술적 영감이 지닌 복잡한 속성을 대신 탐구해나가는 존재로 영화예술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8과 1/2>은 진정한 펠리니의 걸작이었다. 일련의 재귀적 영화들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예술적 영감의 본질을 가장 영화답게 다룬다는 점에서 독특한 영화였다. 기억과 환상과 현실을 한데 묶이고, 현실 속에서 귀도가 부딪치는 고민은 환상의 형태로 전이되면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8과 1/2>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과 고충을 고백했던 펠리니는 이번에는 줄리에타 마시나를 기용하여 <영혼의 줄리엣 Giulietta Degli Spiriti>(1965)을 내놓는다. 이 두 영화는 기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좀더 깊게 파고드는, 말하자면 암수 한몸과 같은 영화였다. <8과 1/2>의 귀도처럼 줄리에타 마시나는 지루하고 위선에 가득한 부르주아 주부를 연기한다.
1970년대 들어 비평가들은 펠리니의 영화가 자기 패러디적이라는 비판을 퍼부었다. 실제로 이후의 그의 작품들은 그의 초기작들에 대한 창백한 모방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영화 연보에서 역사적인 소재를 기반으로 한 것은 <사티리콘 Satyricon>(1969)과 <카사노바 Casanova>(1976) 두개뿐이었다. 제목이 보여주듯, 이 두 작품은 모두 고대 로마와 18세기 유럽의 방탕과 섹스의 환상들 광기의 상태를 보여준다. 또한 <광대>(1970) <펠리니의 로마 Fellini’s Roma>(1972)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왔던 서커스와 광대에 대한 매혹과 로마에 대한 매혹을 자신의 관심사와 경험, 취미, 그리고 그 중심부의 환상과 엮어서 보여주었다.
말년에 그는 더욱더 회고적이 되었다. 유년의 향수와 기억을 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람들과 사건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아마코드 Amarcod>(1974)를 내놓았다. 그는 이 작품으로 네번째 아카데미상을 타게 된다. <아마코드>는 그의 영화 중 아마도 가장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작품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어 말년 작품인 <여자들의 도시 La Citta Delle Donne>(1980)에서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 계속 나타나는 성적인 공포와 욕망을 꿈을 통해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