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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그는 누구인가

크리스틴에 의한 다이애나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의 연기에 대한 찬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펜서>에서 다이애나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새삼 이런 질문을 불러온다.

“Where am I?” 홀로 운전대를 잡고 지도를 보며 길을 찾던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한 식당에 들어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여기가 어딘가요?’ 정도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어디에 있나요?’라고 직역하는 것이 옳다. 이 질문은 현 상태에 관한 자조적인 읊조림만이 아니라, 다이애나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로서의 삶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기보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물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질문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영국 왕실 패밀리로서의 삶에 더는 머물 수 없다는 철저한 각성의 표현이다. 한편 이 질문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은밀히 초대하는 말이다. 늘 무리와 떨어진 채 왕실로부터 거리를 둔 다이애나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중간자적인 주인공이 그러하듯 영화가 그리는 세계를 관객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다이애나는 상황을 통제한 채 자신의 의도대로 관객을 유도하는 전지적인 안내자는 아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주관적인 시선을 담대하게 드러내며, 그 주관성만이 우리가 탐험해야 할 세계의 전부임을 설득한다. 그가 정해진 약속 시각을 지키지 못한 채 무리 중 가장 늦게 도착하는 상황의 반복은 한편으로는 안내자로서 집단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특별한 위치를 표시한다. 숨 막히는 영국 왕실의 생활 습관으로부터 거리를 둔 다이애나는 한 인물에게만은 심각하게 밀착되어 있다. 그 인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유명인을 연기하는 유명인

자기 자신에게 밀착되어 있다니 이상한 말이지만, 실존 인물에 바탕을 둔 작품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는 자신과 자신이 연기해야 할 실존 인물 사이의 틈을 최대한 좁히려 애쓰는 동시에 그가 알게 된 인물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관객이 보는 것은 통합된 캐릭터라기보다는 밀착과 분리를 끊임없이 오가며 완료되지 않은 배우의 ‘되기’ 상태다. 그런 배우를 보는 관객은 배우의 기존 캐릭터에서 벗어난 외양적 변신에 압도되면서도 배우가 가진 기존 이미지와 변신한 현재의 이미지 사이, 반(反)허구적 캐릭터와 실존 인물에 관한 기억 사이를 오가며 즐거움을 누린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에게 쏟아지는 찬사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연기를 감상하는 자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자의 목록에서 유명인을 연기한 배우들의 이름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도리어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를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많은 편이다. 배우 주디 갈런드를 연기한 <주디>의 러네이 젤위거,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한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미 말렉, 윈스터 처칠을 연기한 <다키스트 아워>의 게리 올드먼, 스티븐 호킹을 연기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에디 레드메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연기한 <링컨>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마거릿 대처를 연기한 <철의 여인>의 메릴 스트립 등 비교적 최근의 목록만 놓고 봐도 유명인을 연기한 배우들은 아카데미를 비롯해 그해의 주연상을 휩쓸었다. 여기에는 훌륭한 연기에 주어진 상이라는 본래의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덧붙는다. 유명인인 배우가 다른 유명인을 연기할 때, 허구의 캐릭터를 연기할 때와는 다른 측면에서 연기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촉발한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에게 주어진 상은 그들의 연기가 연기 그 자체를 인식하게 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배우가 수상을 위해 계단을 오를 때 그 곁에서 실존 인물과 그에 대한 기억이 함께 단상에 오른다.

실존 인물의 연기에 관한 평가에서 여전히 ‘싱크로율’이 중요한 잣대로 언급되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싱크로율이라는 기준이 필요한 분야는 분장 혹은 의상 등 제작과 연출의 영역이며, 배우의 연기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스펜서>에서 보여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실존 인물 연기에 관해 설명할 다른 언어가 필요함을 설득한다. 이는 감독의 전작 <재키>에서 어느 정도 예견됐다. <재키>에서 내털리 포트먼은 재클린 케네디와 전혀 닮지 않았다.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것은 오직 의상이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그가 입었던 옷과 그 옷이 요구하는 태도와 습관만으로 한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실험하는 것 같다. <스펜서>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그가 연기해온 캐릭터와 다른 새로운 인물을 창조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허구적인 인물도, 그렇다고 실존 인물과 완벽하게 닮은 것도 아니다.

스튜어트의 다이애나 연기와 견줄 대상은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유명한 허구 캐릭터의 연기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혹은 <배트맨> 시리즈의 배트맨과 조커 등 끊임없이 젊은 배우로 교체되며 명맥을 이어가는 시리즈의 주요 캐릭터를 생각해보자. 새로운 배우는 전임자의 그늘 속에서 잘해야 본전이 되는 힘겨운 영광을 누린다. 캐릭터를 새롭게 연기하는 배우는 한 배우가 반복해서 시리즈를 연기하면서 거의 실존 인물에 가까워진 기존 캐릭터와 차별화된 연기로 그늘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그와 같은 아우라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에게 위안이 되는 믿을 만한 구석은 비슷한 패턴으로 연속되는 전임자의 코스튬이다. 의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역시 <스펜서>와 세계적인 시리즈물의 공통점이다. 유명한 첩보 요원과 히어로가 코스튬을 통해 익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안겨주듯이 스튜어트의 다이애나 역시 캐릭터의 유명한 의상을 연상시키는 코스튬 속에 살아남는 방법을 간구한다. 실존 인물과 비슷하게, 그러나 그에 의해 삼켜지지 않게 거리를 조절하면서 말이다.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업은 원작이 있는 영화의 각색 작업과 비슷한 것일 수 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은 <자마>의 동명 소설 각색 과정을 두고 원작 소설에 감염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다이애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흡수한 뒤 잊어버렸다는 스튜어트의 연기 전략은 무의식에 남은 것들만 건져 올린다는 점에서 ‘감염’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스튜어트가 <스펜서>에서 보여준 연기 중 빼놓을 수 없는 인상적인 요소는 발성법이다. 그는 때때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난방을 켜지 않는 실내에서 추위에 떠는 것처럼, 한숨을 쉬는 것처럼, 구토하는 것처럼,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토해낸다. 스튜어트는 다이애나와 전혀 닮지 않았으나 의심할 나위 없이 다이애나처럼 보인다. 스튜어트의 캐릭터는 실제 인물을 초과한다. 다이애나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정확한 복제라기보다는 복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를 복제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오는 연기를 한다.

유령의 맨살

<스펜서>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지만, 그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영화는 아니다. 대부분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가 인물의 일대기를 그릴 때, 파블로 라라인은 이미지의 조각만을 고집스럽게 인식한다. 그가 영화를 통해 다룬 실존 인물 중 다이애나와 재클린 케네디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들의 삶은 잘 알려진 비극적인 사건에 의해 침식되었다. 다이애나는 결혼 이후에도 남편과 다른 여자와의 관계로 고통받다가 이혼했으며, 머지않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재클린 케네디는 케네디가 카퍼레이드 중 총탄에 맞아 사망할 당시 아비규환을 눈앞에서 겪어야 했다. 비극의 순간은 사라지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반복 재생된다. 사건에 침식되지 않은 것은 그들의 패션이다. 어쩌면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패션 아이콘이라는 이들의 정체성만큼은 비극에도 절대 바래지 않았다. 라라인이 무엇보다 실존 인물의 패션과 외양의 철저한 고증에 집착한 것은 그것만이 비극의 전복을 위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복원하는 것은 시공간이 아니라 오직 한 인물이다. 영화는 다이애나가 머물던 장소로 관객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애나를 우리 곁으로 불러들인다. 카메라는 종종 인물 뒤에서 그 앞으로 펼쳐진 넓은 복도를 원근감을 담아 잡는다. 조니 그린우드가 담당한 음악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모양과 분위기를 바꾸면서 화면 가득 들어찬다. 좁고 긴 런웨이를 걷고 뛰고 춤추는 인물을 따라 움직이는 클레르 마통의 카메라와 함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서사나 정서 혹은 의미라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선보이는 쇼에 압도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다이애나를 앞세운 채 깔끔하게 세팅된 장소 구석구석을 탐사하도록 내버려둔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때때로 가상현실(VR) 체험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공간을 초월한 한 인물의 내면의 집으로의 초대다. 다이애나가 저택 내부를 음악에 맞춰 춤추듯 지나가는 시퀀스는 감독이 <재키>에서 내털리 포트먼을 흑백 화면에 가두었던 것과는 대조된다. <재키>는 배우가 실존 인물이 남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다면, <스펜서>에서는 반대로 배우가 실존 인물을 세계 바깥으로 끌고 나오는 것이 중요한 작품이다.

다이애나가 홀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첫 장면은 어쩌면 실존 인물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연상시키기에 불안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볼 때 그것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일 수 있다. 영화가 실존 인물을 초대하면서 탄생시킨 세계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축약된 시간과 그가 어릴 적 살던 낡은 집이 지척에 놓인 마술 같은 공간이다. 현실과 허구가 분리되지 않은 채 뒤섞인 영화의 배경처럼 배우의 연기 역시, 실존 인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는 듯 반쯤 흐릿해진다. 크리스틴에 의한 다이애나는 단단한 살점을 지닌 유령처럼 보인다. 다이애나는 커튼을 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고정한 와이어를 니퍼로 끊어버린 뒤, 이것이 꿈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맨살을 꼬집어 피를 낸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팔의 상처를 닦아내는 장면까지 선명하던 상처는 이어지는 숏 안에서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이애나의 비전이기에, 다이애나의 상처와 회복은 그리 놀랍지 않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이애나는 찰스(잭 파딩)가 선물한 진주 목걸이를 답답한 듯 끊어버리고 수프와 함께 그 위에 떨어진 진주를 게걸스럽게 먹기까지 했으나 다음 장면에서 진주 목걸이는 얌전히 그의 목에 붙어 있다.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듯 과거 복식으로 출몰하는 앤 불린의 환영은 이 영화가 유령에 대한 영화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방점을 찍는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그는 간통죄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내털리 포트먼이 <천일의 스캔들>에서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바 있다. 다이애나의 침대맡에는 앤 불린의 삶과 죽음에 관한 책이 놓여 있다. 앤 불린의 유령은 다이애나에게 말을 건네고 그를 불러 세운다. 그레고리 소령(티머시 스폴)이 다이애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위해 놓아둔 것처럼 보였던 앤 불린의 책은 결국 계단에서 몸을 던지려는 다이애나의 목숨을 살린다. 그러나 앤 불린도 샐리 호킨스가 연기한 매기만큼 유령에 가깝지는 않다. 매기는 다이애나가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인물이다. 그는 다이애나를 아끼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방을 경계해야 할 다이애나에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던 매기는 한번은 환영으로, 다른 한번은 실제로 다이애나 곁에 나타난다. 그는 내부에서 관객을 안내하는 다이애나 곁에서 외부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그는 미래에서 파견된 다이애나의 팬이자 관객이다.

웅크린 뒷모습에 의한 단상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의상은 흰색 오간자 드레스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이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로부터 몸을 돌린 채 웅크린 모습은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되었다. 영화 속에서 이 드레스가 선보이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화장실이며, 웅크린 다이애나의 앞에 놓인 것이 다름 아닌 변기라는 사실은 이미지를 먼저 접한 이들에게 일종의 반전처럼 제시된다. 공황 상태에 빠진 다이애나는 약속 시각이 임박했음에도 ‘1분만 더’를 외치며 화장실로 뛰어든다. 그의 앞에 놓인 변기는 다이애나가 마주한 것들을 요약하는 사물처럼 보인다. 깔끔하고 화려하고 규칙적인 왕실 이미지에 매료되는 대신, 다이애나에겐 그것이 변기 속 오물처럼 역한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변기에 머리를 기댄 채 움츠린 자세 그 자체다. 실존 인물을 다룬 최초의 영화를 찾던 중 어떤 무성영화에서 그와 비슷한 동작을 발견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처형을 다룬 극영화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1895)은 1분이 채 안되는 짧은 영화지만, 당대의 특수효과 트릭이 사용됐다.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 가운데 처형대를 두고 주도자들이 둘러선다. 그 앞으로 걸어 나와 무릎을 꿇고 처형대쪽으로 목을 기울인 여왕은 마침내 우두머리가 휘두른 도끼에 목이 베인다. 우두머리가 잘린 목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트릭을 사용해 배우의 몸이 촬영용 더미로 바뀌는 찰나의 순간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도록 연결한다. 이를 본 당시의 관객은 실제 처형이 이뤄진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처형대 앞에서 무릎을 꿇은 메리 스튜어트의 마지막 모습처럼 다이애나는 어쩌면 매번 자신을 단두대 위에 올리며 죽음과 싸웠던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그 어떤 실제를 반영한 모사보다 다이애나의 삶에 가까운 허구의 이미지다.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고, 자막으로 번역되지도 않았지만,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에서 여왕은 마지막 말을 내뱉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다른 이들이 그랬듯 마지막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다이애나 역시 변기에 기댄 채 기도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기도에 응답하듯 사라졌던 매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온다. 분명 매기를 반갑게 끌어안았지만, 고개를 돌려 거울을 봤을 때 그는 매기가 아니다. 그러나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을 뿐 매기는 분명히 다이애나 앞에 다시 나타난다. 다이애나가 그러했듯 조금 늦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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