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빛, 시선, 팝콘과 콜라, 소곤소곤과 부스럭, 웃음과 눈물, 주변의 낯선 사람들, 그리고 2시간 동안의 감금. 다시, 비평이 시작되어야 할 장소를 기억하며.
*안시환 평론가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프런트라인을 잠시 떠납니다. 안시환 평론가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흥행이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수다
<오징어 게임>의 공개와 함께 참으로 오랜만에 ‘영화적 수다’가 펼쳐지고 있다. 이 수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레퍼런스에 대한 논쟁에서부터, 작품 자체에 대한 찬반 논란, 이 놀이 문화가 일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논쟁, 그리고 영화가 다루는 사회적 이슈와 전세계적으로 거둔 흥행에 대한 논의까지, 코로나19가 닥친 2020년 2월 이후 이처럼 다양한 영화적 수다가 들려오는 것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수다를 덧붙여볼까 한다. 비평이 아닌 수다.
표면적으로 보면 <오징어 게임>,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이하 <무브 투 헤븐>), <D. P.>는 넷플릭스의 2021년 오리지널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OTT 플랫폼에 적합한 서사적 형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 작품이 애초에 OTT 플랫폼을 겨냥해 기획된 작품인지 아니면 극장용 영화로 기획되었다 시리즈물로 각색된 것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이들 작품은 그 이전의 넷플릭스 시리즈와 구별되는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들 작품은 먼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큰 이야기를 설정한 뒤, 작은 사건을 하나씩 완결하는 방식으로 한회 한회를 채운다. 각자의 이유로 탈영한 군인이 하나씩 검거되고, 존재감 없던 이들의 기억할 만한 사연이 유품 정리 과정에서 드러나며, 간단한 옛 놀이가 생존 게임이 되어 한회 한회가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작은 이야기는 큰 이야기에 수렴되는데, <무브 투 헤븐>은 그루를 입양한 부모의 사연이, <D. P.>는 가장 선했던 선임병이 점점 변화하다 탈영하는 이야기가, <오징어 게임>은 누가 최후까지 살아남아 456억원의 주인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OTT 시대의 영화적 잔영
한회 한회를 최대한 완결하면서도 시리즈 전체를 아우르는 큰 이야기가 공존하는 이러한 화법에 가장 어울리는 서사 장르는 영화보다 만화(책)였다. 이들 작품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들 만화(책)는 대적할 상대(또는 적대자)가 등장하는 한 드라마를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만화의 서사는 작은 이야기의 반복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네 쓰네히로는 <젊은 독자들을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에서 이러한 만화의 서사 구조를 두고 ‘배틀 토너먼트’라고 명명하는데, 이때 작은 이야기는 늘 동일한 패턴의 구조가 반복된다. 큰 이야기 차원의 서사는 멈춰 있거나 느리게 전개되지만, 동일한 패턴의 작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한회 한회를 채우는 것이다. 최소화된 큰 이야기에 새로운 캐릭터에서 비롯되는 동일한 패턴의 작은 이야기를 무한 반복하는 <원피스>처럼 말이다. 두 번째 시즌이 제작된다고 해도 패턴화된 작은 이야기에 의존하는 서사 구조에서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오징어 게임> <무브 투 헤븐> <D. P.>의 이러한 서사 구조가 OTT 오리지널 시리즈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작품이 앞서 언급한 만화(책)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사회적 맥락을 지운 기계적인 비교이긴 하지만, 우네 쓰네히로는 인물의 내적 성장이 정체되는 현상을 이들 만화의 딜레마로 지적한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 <무브 투 헤븐> <D. P.>는 패턴화된 이야기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내적 성장이 감지된다. 표면적인 것에 불과해도, 이들 작품에는 각성과 내적 성장을 겪는 인물이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차이가 OTT 플랫폼 시대의 서사에 남아 있는 ‘영화의 흔적’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 영화는 작은 이야기를 큰 이야기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데, 이때 큰 이야기는 인물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패턴화된 작은 이야기가 OTT 시대와 타협화한 결과라면, 큰 이야기는 영화의 잔영이다. 우리는 이들 작품에서 영화에 대한 향수를 가져야 할 것인가, 아니면 패턴화된 서사가 주는 동어반복적인 즐거움에 안주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자발적 선택의 시대
가입자 수를 근거로 넷플릭스의 위기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가 곧잘 들리긴 하지만, 넷플릭스는 단지 일개의 OTT 플랫폼이 아니라 영화의 상영 방식과 이로 인한 텍스트적 변화를 압축적으로 표상하는 시대적 상징에 가깝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징어 게임>을 ‘넷플릭스 시대’에 영화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다. <오징어 게임>에 관한 많은 기사가 ‘흥행’과 ‘성공’을 이야기한다. 미국에서 1위를 기록했다는 것이 주로 성공의 근거로 거론되는데, 과연 그것이 과거와 동일한 차원에서 문화적 성과나 상업적 흥행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적으로 큰 시청률을 보인다 해도, 넷플릭스 알고리즘은 한국영화(또는 시리즈)를 특별하게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의 국적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넷플릭스에 한국 작품은 아시아로 묶을 수 있는 수많은 작품 중 하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징어 게임>이 한국의 문화적 성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넷플릭스가 한국을 자신의 게임에 참여한 자들 중 좀더 우승 확률이 높은 말로 평가할 수 있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456명 중 하나일 뿐이다.
이와 함께 ‘흥행’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도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구독형 OTT 플랫폼에서 상업적인 흥행의 주체는 <오징어 게임>이 아니라 넷플릭스이기 때문이다. 모든 수익과 그와 관련된 정보를 넷플릭스가 독점한다.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을 통해 가입자 수가 유지되거나 신규 가입자를 유치한다 해도, 그것은 넷플릭스의 수익이지 <오징어 게임>을 제작한 제작사나 한국 문화산업과는 무관하다. 지금의 OTT 플랫폼 구조에서 수익의 순환고리는 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을 거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국 영화산업이 할 수 있는 건 저 높이 매달린 투명 돼지저금통에 돈이 쌓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OTT 플랫폼 시대에 그 돼지저금통은 게임에 참여한 자들의 몫이 아니다. 흥행이라는 표현은 착시의 결과다.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게임을 지켜보는 자와 그 게임의 일부가 된 자들, 그러니까 넷플릭스가 촉발시킨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와 그 게임을 지켜보는 자들간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에 대한 텍스트적 비평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한 가지 꼭 짚어야 하는 것은 영화에 내재한 ‘선택의 논리’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부분이기도 한데, 게임에 참여할지 참여하지 않을지, 게임을 지속할지 중단할지에 대한 선택권은 참여자들에게 있다. 길을 가다 만난 깡패가 칼을 들이밀면서 말한다. 돈 줄래, 아님 죽을래? 깡패와의 만남에 비유되던 ‘강요된 선택’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의 이 시대가 더 잔인한 것은 강요된 선택이 자발적 선택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마치 게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게임의 말들처럼.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시대,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낸다면, 그건 바로 이 선택과 관련해서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게임, 하지만 그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