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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의 큐비즘적 화면 구성에 대해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다큐멘터리적 질감과 뇌와 정신의 여정이 한 스크린에서 동시에 펼쳐질 수 있을까? <자마>는 그런 망상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파괴와 망상

한 손에 검을 들고 머리엔 삼각모를 쓴 남자가 해안가 앞에 꼿꼿이 서 있다. 제국주의 개척자를 묘사한 회화의 한 장면처럼 조직된 프레임의 구도가 허물어지는 건 화면 바깥에서 정체 모를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다. 소리에 이끌려 걸음을 옮긴 남자는 나체로 진흙 목욕을 하는 원주민들을 훔쳐보는데, 그의 시선은 금방 여인들에게 발각되고 도망치는 남자를 쫓아온 한 원주민 여인과 비루한 몸싸움을 벌이기에 이른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네 번째 장편영화 <자마>의 도입부는 익숙하게 여겨지는 풍경 위에 이질적인 세부를 덧칠한다. 위엄 있는 자세로 식민지 풍경을 주시하는 백인 남성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런 남자의 시선이 원주민들의 벗은 몸으로 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훔쳐보던 것을 들킨 남자가 옹졸한 자세로 몸을 숨기고 우스꽝스럽게 도망치는 건 생경한 묘사다. 이런 장면을 두고 남성적 욕망의 허위를 조롱하고 폭력과 관음의 위계를 뒤집기 위한 전복의 시도라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내게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상이한 요소들과 동작으로 무질서하게 화면을 교란하는 방식이다. 이 일련의 장면들에선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관음증의 시선과 시각에 노출된 몸, 공격성과 수동성이 그것을 수행하는 이들의 사회적 위상과 무관하게 교차하며 펼쳐지고 있다. <자마>는 이러한 시청각적 교란의 기록이다. 이 영화에서는 서서히 편집증적으로 변모하는 한 피사체(‘자마’)의 왜곡된 감각을 빌려, 사방에서 쏟아지는 세계의 빛과 어둠, 무작위로 발생하는 움직임과 소리를 영화의 단면에 침투시킨다.

큐비즘의 눈

고정된 중심점으로 수렴되지 않는 무질서한 운동은 <자마>에 구축된 프레임 전반에 걸쳐 벌어진다. 영화의 초반부, 식민지의 왕실 관료인 자마가 상인이 들여온 물건들을 확인하는 대목에서 영화는 화면 뒤편으로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강조해서 들려준다. 초점은 프레임 전경에 잡힌 자마의 얼굴에서 후경의 아이로 움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트랙과 더불어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를 따라 이어지는 장면의 방향성이 불규칙적으로 연결된다. 아이는 입을 열지 않은 채로 자마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중얼거리고(“자마, 늙어서 태어나 죽지 못하는 자, (...) 검을 뽑지 않고 정의를 집행하는 자”) 손을 대지 않고도 허리춤에 있던 검을 가져간다. 곧이어 장면이 전환되면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인물의 말과 행동과 실체가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없는 불가해한 사태로, 그럼에도 자마의 눈앞에 펼쳐진 것만은 분명한 현상으로 각인된다. 이 시퀀스에서 드러난 감각적 균열은 아내와 가족이 사는 스페인으로 떠나고 싶어 하나, 전근 요청이 연달아 무산되며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는 자마의 심리적 분열을 예견하는 한편(그러므로 그의 신체와 욕망은 이중화된다), 한 사람의 신체가 일으키는 혼란에 실체와 환각, 역사적 풍경과 우화적 이야기를 나란히 투사하는 입체파 회화와 같은 배열을 드러낸다. 이 순간 카메라는 출발점과 목적지가 불분명한 모순된 감각의 땅으로 불현듯 발을 내디딘 것이다.

<자마>는 일견 식민지 지대를 배회하는 백인 남성의 감수성과 욕망을 해체하려 드는 탈식민주의 정치 영화로 받아들이기 쉽다. 베르너 헤어조크 이래로 무수히 변주된 자기파괴적 열망과 탐험의 한 사례로 기입한다거나 또는 남아메리카의 민속지적 풍경으로 잠입하는, 그러나 쉽게 포획되지 않는 풍경과 대지 속에서 산화하는 남성 주체의 여정이라는 공통점에 기반해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 치로 게라의 <뱀의 포옹>과 같은 동시대 중남미 작가영화의 계열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그러나 이 급진적인 영화를 범용한 인식의 테두리에 가두는 어색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마>에는 분명 식민주의 담론을 건드리는 정치적 기호들이 적잖게 배치되어 있지만,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보여주는 것은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그러한 정치적 기호들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순간들의 연쇄다. 영화는 안토니오 디 베네데토의 동명의 원작 소설에 설정된 구체적인 시공간의 표식들을 지우고 그 대신 반복된 형상과 구도를 공회전하는 세계를 구축한다. <자마>가 스크린에 투사하는 세계는 18세기의 광경을 정교하게 재현해낸 역사적 장소가 아니라, 마비된 시간의 환각적 감각으로 가득한 낯선 지대다.

그런 맥락에서 <자마>는, 외형상으로는 닮은 구석을 찾기 어려워 보이지만, 영화적 프레임 내부의 절대적인 혼란과 자유를 추구한 키라 무라토바의 <무기력 증후군>, 동물과 인간의 형상을 아나키즘적 시선으로 무차별하게 배치하는 고다르의 근작들에 접근해 있다. 그들의 작업은 직접적인 현실 정치적 발언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는 형태를 비타협적으로 재고하는 시도를 통해 영화의 가능한 윤곽과 역량을 헤아려본다는 측면에서 또한 접점을 이룬다. 무라토바와 고다르의 영화가 그러하듯, <자마>는 하나의 장면에서 둘 이상의 목소리(자마와 총독이 대화하는 순간에 난데없이 비쿠냐의 썩은 귀를 탐내는 총독 부하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움직임(이 영화에서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주로 프레임 가운데 벽이나 문을 마련하고 전경과 후경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을 동시적으로 활용한다), 음향 신호(영화는 줄곧 화면 내부에 감도는 소리와 화면 바깥의 청각적 자극을 점진적으로 배치해둔다)를 만들어내면서 서로 다른 방향과 목표를 향해 퍼트린다.

앞서 언급한 키라 무라토바의 영화 제목처럼,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그려낸 자마라는 인물은 도망칠 수 없는 열대의 기온 아래서 무기력증을 호소하거나 잠에 빠져들고, 그런 권태로 인해 그가 간직한 어느 열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스페인으로 떠나려는 계획은 물론, 백인 여인들을 향한 성적 탐닉에도, 흉악범 비쿠냐 포르투를 잡으려는 시도 모두 실패하고 만다. 이건 이름 모를 아이가 비밀스럽게 속삭여주었듯이 자마가 “늙어서 태어나 죽지 못하는 자”라서, 이 마비된 시간을 한없이 기다리고 통과하는 자이기 때문일까? 젊음의 기록이 삭제된 자들. 관능적인 육체의 자극과 매혹이 적지 않음에도 그들이 머무는 세계는 성애와 재생산이 철저히 배제된 메마른 장소다. 겹겹이 둘러싸인 문과 구멍 뚫린 창문.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은 구조의 실내 공간을 오가는 동안 인간의 몸은 썩어버린 귀와 말할 수 없는 혓바닥으로, 잘려 나간 두 손과 오한에 떠는 피부로, 결국에는 나무에 매달린 시체로 이행한다.

몽타주의 망상

<자마>의 사람들은 정물처럼 굳어가고 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고정된 구도 내에 움직임을 멈추다시피 한 인물들을 사물과 같은 속성으로 배치해둔다. 모든 인간적 열망이 무산되고 권태로 가득한 무대에서 반대로 왕성하게 화면을 자극하는 것은 동물과 곤충의 움직임이다. 자기를 밀어내려는 물의 장력에 맞서 부단히 헤엄치는 물고기 떼, 화면 내부를 자유롭게 차지하고 돌아다니는 라마와 말, 집의 벽면을 갉아먹는 벌레들, 저절로 기어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길바닥의 상자에 이르기까지. 마치 곤충학자의 시선으로 피사체를 관찰하는 듯한 이런 장면들로부터 정지된 화면에 움직임이 부여된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표현을 빌리면 이와 같은 동물 혹은 곤충의 활동을 통해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지각을 새겨넣는 것이다.

<자마>의 프레임에 끊임없이 형성되는 무차별적인 교란은 인간적 활동이 차단된 세계에 도래한 움직임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교란이 실행되는 가운데 영화는 모든 피사체의 등가성을 구현한다. 자마를 둘러싸고 원을 그리는 세 자매의 패턴화된 움직임은 육지로 떠미는 물에 대항해 헤엄치는 물고기 떼, 벽을 갉아먹는 벌레들의 집단적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카메라는 그렇게 인간과 동물과 곤충을 공통의 장소로 불러들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동물과 곤충의 물리적 세계를 관측하면서 그것을 자마의 착란적 상태와 결합한다는 점이다. 물속에 머무르려는 물고기 떼의 장면을 비추며 “이 물고기들은 강의 중심부에 없고 둑 근처에 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둑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자마의 멈춰 선 뒷모습을 마주한다. 앞선 컷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가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둑 근처에 있다.” 또 다른 장면. 썩은 벽에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가득 보여준 뒤, 다음 컷에 고치와 같은 흰 이불을 온몸에 두른 자마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가 희망하는 모든 열망의 실패가 예견된 사태라면, 자마는 물속의 물고기로, 벽을 갉아먹는 애벌레로 그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는 망상에 붙들린다. 다른 대상의 몸으로 침입하고, 자기 자신의 몸을 타자화하는 것. 그것은 영화가 발명되지 않은 시기에 꾸는 몽타주의 망상이다.

이 몽타주의 원리는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말한 그대로다. 감독은 <자마>의 배경을 두고 “이미 파괴된 세계, 그래서 여전히 망상 속에 사로잡힌 세계”라고 밝히는데, 이는 영화의 공간적 무대인 18세기 남아메리카를 지목할 뿐만 아니라, 자마에게 주어진 두 가지 작용, 인간적 열망의 파괴와 그의 내면에서 여전히 만들어지는 망상 또한 가리키고 있다. 진정 프리즘적인 분열이 이 인물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마>는 문자 그대로 두 눈의 응시를 요구하는 영화다. 자마의 시각을 전제한 이 영화의 프레임은 한쪽 눈으로 파괴된 식민지의 현실적 풍경을 바라보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인간과 동물과 곤충이 구별 없이 뒤섞인 몽상적 세계를 투사한다. 이는 터무니없는 비전이지만, 이 충돌된 시각이 없다면 영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탈진과 안식

그러므로 후반부에 이르러 당혹스럽게 맞닥뜨리는 비쿠냐 포르투는 마지막으로 출현한 자마의 뒤집힌 변형이라 말할 수 있다. 수천 번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비쿠냐는 자마와 마찬가지로 또 한 명의 죽지 못하는 자다. 눈앞에 당도한 비쿠냐가 강간과 살인을 일삼는 흉악범이 아니듯이, 이 순간에 자마는 왕실 관료이자 치안판사가 아니다. 영화는 두 무명의 인간이 맞부딪힌 자리에서 더 이상의 망상과 열망이 지속될 수 없음을 무심히 알린다. 몽타주가 불가능해진 자리. 어디에서도 귀속할 곳을 찾지 못한 자마는 바로 이 자리에 다다른 뒤 희귀한 둥근 돌이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 순간에 그의 여정은 잘려 나간 두 팔과 함께 끝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쪽 손에 검을 들고 수직으로 선 자마의 형상은, 양쪽 팔이 잘린 채로 작은 배에 수평으로 누워 떠내려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른다(배에 실린 이 남자의 신체가 도착하는 곳엔 어쩌면 현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삼은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데뷔작 <>의 수영장에 누운 부르주아들의 늘어진 몸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부동 상태에 이른 자마가 아무런 저항 없이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해가는 느린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어느 소년이 그에게 귓속말을 속삭인다. 이 촉각적인 영화는 모든 것이 탈진하고 나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순간에도 하나의 작은 신호를 불어넣는다. 그것은 망상이 사라진 뒤에도, 죽을 수 없는 남자의 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자극이다. 바로 이 순간을 끝으로,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화적 망상을 완성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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