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웠던 늦봄의 어느 날, 춘천의 명동거리에는 때 아닌 크리스마스가 한창이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색색의 장식용 전구들이 드리워진 눈내리는 하늘. 교복 입은 학생들과 선물꾸러미를 안은 아이들, 굵게 세팅한 파마머리 여인들을 헤치고 김득구와 그의 연인 경미가 등장한다. 가진 거라고는 따뜻한 가슴과 든든한 주먹뿐인 가난한 연인들이지만 이들의 표정만큼은 천하를 얻은 듯 밝다.
지난 3월 장엄한 LA 권투경기신을 공개했던 곽경택 감독의 신작 <챔피언>이 두 번째로 공개한 이 신은 김득구와 그의 연인 이경미의 데이트 장면. 82년 김광민전을 앞둔 무렵, 큰맘먹고 사준 통닭이 식을까 한시라도 빨리 집에 보내고 싶어하는 득구와 조금이라도 오래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경미의 가벼운 승강이가 오간다. “다 식어, 빨리 들어가서 식구들이랑 뜯어.” “(뽀루퉁) 내가 뭐 통닭 먹으려고 데이트하는줄….” 득구의 ‘쪽’ 하는 기습 뽀뽀. 경미의 얼굴이 살굿빛으로 물든다.
곽경택 감독의 현장은 늘 즐겁다.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지시를 내리면 엑스트라들 사이에서도 여기저기 웃음이 터진다. “와, 함 벌렸다 아이가. 쏙이 다 시원하네!” <친구>를 찍을 당시 충분치 않았던 예산 때문에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리신을 늘 클로즈업으로만 찍었던 아픈 기억이 있는 곽 감독은 시원하게 전경을 잡아도 거슬림 없이 완벽히 세팅된 오늘의 촬영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액션신을 찍을 때보다는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진지하게 촬영에 임하는 유오성은 모니터 앞에서 촬영 세팅을 기다리며 몇 백번을 보았을 법한 시나리오 앞장에 실린 김득구의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잘 찍어야죠, 죽은 사람 팔아먹었다는 소리를 안 들으려면….”
넉넉한 체구의 곽경택 감독, 작지만 강단진 홍경표 촬영감독,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진 유오성. 이렇게 ‘스리 톱’이 힘을 합쳐 만들어내는 이 시대의 <챔피언>은 오는 6월 말 관객을 향해 첫 번째 잽을 날린다. 사진 이혜정 [email protected]·글 백은하 [email protected]
사진설명
1. <챔피언>을 통해 데뷔하는 채민서는 고운 선의 눈매와 얼굴형을 가진 복고미인. 오디션 당시 유오성의 실물을 본뜬 모형을 세워놓고 고른 배우라 두 사람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2. 춘천의 명동거리에는 복고풍 의상과 헤어 스타일을 한 300명의 엑스트라와 구세군 냄비, 군고구마 장수, 포니 택시까지 총출동해 감독의 ‘슛’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튀밥을 갈아만든 ‘쌀가루’눈이 강풍기를 타고 하늘에 흩뿌려지면 카메라가 하늘 높이 붐업하고 80년대의 서울 명동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3. “<억수탕>부터 <친구>까지 함께 작업했던 황기석 감독이 조강지처라면 홍경표 감독은 너무나 예쁜 애첩 같은 느낌이다.” 꿀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듣는 최상의 팀워크를 자랑하는 이들은 늦게 만난 “둘도 없는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