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둘, 그리고 셋
김혜리 2015-12-03

※<스파이 브릿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바둑>

연말 결산을 대비해 놓친 수작을 따라잡는 이삭줍기철이 돌아왔다. VOD로 직행한 오스트레일리아 공포영화 <바바둑>은, 분만하러 가는 길에 사고로 남편을 잃고 7년째 싱글맘으로 과로하며 살고 있는 아멜리아의 이야기다. 엄마를 짓누르는 피로와 우울을 감지한 아들 사무엘은, 밤마다 동화 속 괴물 바바둑의 끔찍한 노크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호러에 과연 초자연적 현상이 있긴 한 걸까? <악마의 씨>나 <케빈에 대하여>와 동시상영해도 어울릴 영화지만 <바바둑>은 충분히 독창적이다. 아멜리아 역의 에시 데이비스는 발성부터 액션까지 모든 수단을 구사해, 여성 심리의 넓은 스펙트럼을 서슴없이 표현한다. 미술팀이 제작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팝업(pop-up) 동화책을 들춰보는 재미는 덤이다.

11/10

스티븐 스필버그의 냉전시대 첩보영화 <스파이 브릿지>에는, 흔한 의미의 액션 스펙터클로 간주될 만한 장면이 딱 한번 나온다. 미국 첩보기가 격추돼 소비에트 상공에서 추락하는 대목이다. 비상 탈출한 파일럿 파워스(오스틴 스토웰)가 조종석에 연결된 채 기체와 함께 곤두박질치고, 낙하산을 펴나 싶더니 비행기 파편이 덮쳐오는 광경은 아찔하다. 그러나 여느 영화라면 클라이맥스로서 방점을 찍을 만한 이 장면은 <스파이 브릿지>가 제공하는 영화적 장관(壯觀) 가운데 2급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스필버그는, 다른 리그 소속이다. <스파이 브릿지>에 즐비한 영화적 아름다움과 그것이 연쇄되는 리듬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묘사 외에 더 나은 방도를 모르겠다.

미국 동부에서 십수년간 암약해온 노련한 소비에트 첩자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을 소개하고, 냉전기 미국 사회의 공기 속으로 관객을 데리고 들어가는 <스파이 브릿지>의 초반 10분에는, 이렇다 할 대사도 화면 밖 음악도 없다.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던 아벨이 걸려온 전화를 대꾸 없이 끊고 나면 FBI가 지하철에서 아벨을 뒤쫓는 시퀀스가 이어진다. 이 추격에는 물리적 충돌도 복잡한 미로도 없다. 그냥 일자로 뻗은 아주 짧은 플랫폼에서 평범한 외모의 아벨이 비슷한 중산모와 칙칙한 양복 차림의 통근자들 사이에 섞여들고 FBI 요원의 시야가 혼선을 빚는 시점숏만으로 마법이 일어난다. 제이슨 본이 군중과 비슷한 속도로 쉬지 않고 움직여 적을 따돌린다면, 아벨은 대담하게도 체포망보다 한 박자를 늦춰 위기를 벗어난다. 간략하고 절묘한 추격전 연출은 아벨의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이 CIA의 미행을 눈치채는 빗속 퇴근길에 한 차례 더 선보인다. 뒤밟는 요원은 우연히 뒤엉킨 행인들의 우산에 가로막히고, 도노반은 어둠 속 검은 자동차 그늘에 웅크린다. 뛰어난 영화 속 추격전에 꼭 페라리가 필요하지는 않다. 다시 도입부로 돌아가자. 임박한 체포를 예감한 아벨의 일거수일투족을 야누시 카민스키의 카메라는 무슨 공연이라도 되는 듯 숨죽이고 음미한다. 긴장을 제고하는 극적 음악은 없다. 대신 이웃이 연습하는 바이올린, 길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일상적 소음이 스파이로 산다는 일의 이율배반적 감각을 전한다. 아벨은 마침내 들이닥친 FBI를 “손님이 오셨네?”라며 속옷 바람으로 마주한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깜짝 놀란 척하는 수고조차 들이지 않는다. 온 집 안을 홀딱 뒤집는 FBI와 그 옆에서 기밀 메모로 느릿느릿 팔레트를 닦는 아벨은, 시끄러운 무능과 고요한 유능함으로 대비된다. <스파이 브릿지>의 오프닝 10분은 따로 떼어 하나의 단편으로 수십번 돌려보아도 질리지 않을 터다. 가장 유사한 체험이라면, 오직 혼자 유정을 파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노동만으로 채워졌던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도입부를 꼽을 수 있겠다. 은어의 헤엄처럼 매끄러운 <스파이 브릿지>의 운동은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는다. 유일하게 영화가 멈칫하는 대목은 70분 지점에서 베를린의 미국인 유학생이 스파이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에피소드다. 그러나 아벨도 도노반도 빠진 이 간주의 배치는 영화의 반환점이자 인터미션으로서 정당화될 만하다.

11/11

루돌프 아벨이라는 인물에게 헌정된 과묵한 10분이 지나면, 곧이어 제임스 도노반 변호사의 물샐 틈 없는 대사가 쏟아진다. 각색자 코언 형제의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기여를 관객이 실감하는 첫 순간이다. 보험 전문 변호사 도노반은 자신이 대리하는 보험사의 어느 가입자가 5명의 오토바이 운전자를 연쇄적으로 부상시킨 사건에 대해 1건밖에 보상할 수 없음을, 볼링과 태풍에 비유해 얄밉도록 깔끔하게 주장한다. 언뜻 주인공을 인간미 없게 그리는 이 장면은 도노반 변호사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핵심 둘을 전달한다. 첫째, 이 남자는 매우 유능하다. 둘째, 그는 물러서지 않는 불도그다. 앞서 도입부에서 체험한 침묵이 도노반의 예리한 언어들을 더 빛나게 하고, 역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스파이 브릿지>는- <씨네21> 1029호 영화비평 섹션에서 송경원 기자가 정리했듯- 무수한 대립항들로 축조돼 있다. 뉴욕에서 전개되는 영화의 ‘1부’는 거울로 시작하고, 베를린으로 옮겨가는 ‘2부’는 장벽에서 출발한다. 거울은 반영하고 장벽은 갈라놓는다. 거울은 동일성을 전제하며 장벽은 차이를 강조한다. 대립항의 목록은 미국과 소련, 양국의 근간이 되는 가치체계를 대변하는 도노반과 아벨, 뉴욕과 베를린, 아벨과 파워스처럼 굵직굵직한 항목에 그치지 않고 미세한 디테일에까지 미친다. 기밀을 담은 아벨의 동전과 자살용 독침이 든 미군의 동전, 스파이 교환이 실행되는 베를린의 두 다리, 미국 첩보기의 고성능 장비와 상대적으로 소박한 아벨의 도구들, 구금된 미국 유학생 프라이어와 동갑인 도노반의 후배 변호사 더그가 대칭을 이룬다. 도노반에게 아벨의 국선변호를 맡기는 장면에서 비서가 활짝 열어주었던 사무실 문은, 최선을 다해 아벨을 변호한 도노반이 ‘공공의 적’으로 몰린 후 도노반의 코앞에서 쌀쌀맞게 닫힌다. 한편 자국 스파이 파워스를 성가신 낙오자로만 취급하는 CIA 공무원들의 냉담한 태도는, 아벨과 도노반의 인간적 교감과 극명히 대비된다. 영화가 베를린으로 이동해 소련과 동독이 이야기의 스코프에 포함되면서 2라는 의미심장한 숫자는 3이 되기도 한다. 도노반이 도움을 청하는 동독 법무장관의 젊은 비서는 프라이어와 더그의 또래로 보이고, 도노반이 이야기의 끝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에 성공하는 남자는 세명이다. 감탄하던 나를 후려친 결정타는 스필버그의 최근 인터뷰였다. “<스파이 브릿지>는 CG가 중요한 영화도 아니고 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링컨>처럼- 스토리보드 없이 찍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쌍쌍의 모티브로 가득 채워진 영화가 ‘숨은그림찾기’의 쾌감을 제공하는 것 말고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 있다. 내게 <스파이 브릿지>의 아름다움은, 이 크고 작은 대립항을 구성하는 정과 반이 변증법적 합을 이루는 광경으로 완성됐다. 5건의 피해를 1건의 보상으로 관철시켰던 냉정한 보험 변호사 도노반의 셈법은, 베를린에서 2명의 미국인을 1명의 소련인과 교환한 셈법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스파이 브릿지>는 말한다(스필버그는 도노반이 각성하거나 번민하는 장면을 넣지 않았다). 두 행위 모두 의뢰인을 충실히 대변하고 그의 권리를 지키는 법조인의 직업적 원칙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국가를 헌법에 앞서는 절대적 존재로 신성화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도노반은 국가를 국민 개인이 헌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체결한 ‘계약’으로 이해하기에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아벨을 처형하지 말도록 판사를 설득한 도노반의 논거는, 미국 첩보원의 생명과 맞바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보험’을 들어두자는 것이었다. 도노반의 거울상인 늙은 스파이 아벨에게도 국가는 “늘 옳지만은 않은 보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하여 <스파이 브릿지>는 누구보다 미국적 이상을 대변하는 화가 노먼 록웰의 <삼중 자화상>을, 역설적이게도 소련 스파이의 모습으로 재연한 최초의 숏으로 귀환한다(<씨네21> 1028호 ‘영화의 일기’ 참조). 아벨은 이쪽에서는 간첩이고 저쪽에서는 훌륭한 병사지만 개인으로 존재할 때는 예술가다. 그의 다중적 정체성은 캔버스 위에서 종합된다. ‘화가’ 아벨은 감독 스필버그의 초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시대극이 현대 미국의 이슈와 연결되는 지점을 꼭 집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파이 브릿지>의 냉전 상황은 9•11 이후 전개된 안보와 자유,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 실태를 둘러싼 논란을 과거에 비춰보게 한다. 스필버그는 “오늘날이라면 아벨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나?”라는 라디오 인터뷰의 질문에 “에드워드 스노든이 반역자로 불릴지언정 테러리스트로 규정되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에서 아벨을 테러리스트라 부르긴 어려울 것 같다”고 답하기도 했다.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아벨 곁에는 현재를 비추는 역사를 들여다보며 영화를 찍는 감독이 있다.

<달콤한 인생>

좋아요

플립 휴대폰

<내부자들>의 안상구(이병헌)는 대기업의 비자금 정보를 흘렸다가 끔찍한 린치를 당하고 감시 아래 놓인다. 복수를 꾀하는 그는 추적이 불가능한 구식 휴대전화를 쓴다. 안상구가 플립 폰을 열었다 닫는 모습을 보다가 불현듯 괴상한 향수에 사로잡혔다. 뚜껑이 없고 가상 키패드를 쓰는 스마트폰에 비해 플립 폰은 훨씬 영화적이다. 딸각 하고 감정을 담아 한손으로 폴더를 접는 소리로 숏에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고, 테이블 위에서 진동할 때도 박력이 넘쳐 우리를 소스라치게 했더랬다. <디파티드>에서 맷 데이먼이 주머니 속 플립 폰의 자판을 더듬어 문자를 전송하던 장면의 스릴은 또 얼마나 깨알 같았던가!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