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쥴레! 밀크 티? 블랙 티?” 찻주전자를 들고 벌판을 누비는 인도인 청년이 인사말과 함께 차를 권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촬영준비를 시작한 스탭들이 차 한잔으로 몸을 녹일 즈음, 그제야 설산 너머로 동이 트고 동자승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한다. 인근 라마사원에 살고 있는 예닐곱살부터 열여섯살까지의 동자승들이 바로 이날 찍을 광고의 모델. 바람부는 먼 언덕을 그들이 오르자, 사이언빛 벌판과 붉은 승복자락이 어우러지면서 모니터는 금세 아름다운 색감으로 물이 오른다.
여기는 인도 북서쪽 라닥 지방의 레(Leh). 히말라야 산기슭 해발 4천m 이상 고산지대에 자리한 ‘리틀 티벳’마을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반문명 보고서 <오래된 미래> 이후 유럽인들이 즐겨찾아온 정신적 휴양지이자 인접한 파키스탄과 대치상태인 인도 최전방이기도 한 독특한 곳이다. 델리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 그 한 시간 동안 비행기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데, 겨울이면 마날리에서 이어지는 육로가 끊겨 하루 한번뿐인 이 비행기가 유일한 외지와의 교통수단이 된다.
“세상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언어, 축구”, “작은 공 하나가 세상 모두를 만나게 합니다”를 카피로 하는 이 광고는, 포스코가 유니세프를 통해 오지 및 분쟁지역 어린이들에게 축구공을 나눠주는 활동을 알리고자 제작됐다. 동자승들이 나오는 ‘실타래’편과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나오는 ‘깡통’편 모두 현지 어린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다분히 다큐적인 광고. 촬영은 2월22일부터 25일까지 나흘간 이뤄졌다.
촬영현장의 모습은, 흔히 보지 못할 진귀한 것이었다. 건조한 영하의 추위에 대비하다 보니 미쉐린 타이어 모델처럼 껴입고만 스탭들과 뛰어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운지 반팔차림을 택한 동자승들부터, 넓은 벌판 위를 가로지르는 기자재들의 전깃줄까지. 어린이들의 자연스런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는 피사체로부터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설치됐고, 600mm 망원렌즈는 먼 설산과 스탁나라는 이름의 작은 라마사원, 동자승들이 축구하며 일으키는 붉은 먼지를 하나의 그림 안에 잡아냈다.
난징 니마, 징징 분조 등 재미있는 이름들의 아이들은 멀리 있는 카메라에 신경쓰지 않고 축구에 열중. 골인이 되면 환호를 하고 땀이 나면 승복의 숄을 벗어던지며 법회 대신 축구만 하는 하루를 맘껏 즐겼다. 젊은 남자 스탭들과 무산소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현지 촌로 한분, 그리고 스물여섯살의 큰스님이 그들을 통솔했다. 감독과 모델 사이의 의사소통은 몇 단계를 거쳐야 했다. 감독이 곁에 있는 스탭에게 지시를 하면 그가 무전기로 언덕 위에 있는 다른 한국인 스탭에게 전달, 영어를 하는 스탭이 다시 현지 촌로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가 힌디어로 동자승들에게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복잡한 과정이었지만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영화촬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과 신 사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은 없었다.
현장에서 식사는 캐터링이 해결했다. 한쪽에 천막을 치고 현지 요리사들이 요리를 했고, 설산이 바라다보이는 들판 위에 테이블을 펴고 앉아 멋진 야외식사를 하곤 했다. 메뉴야 현지인들은 커리와 닭고기 등 현지음식이었고, 인도향에 익숙지 않은 한국인들은 햇반과 사발면, 양념고추장과 볶은김치, 김, 통조림에 담긴 정어리나 참치로 이루어진 한식. 지역특산물인 살구로 만든 수정과는 후식으로 그만이었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허허벌판에 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 남자들은 작은 바위 등 지형지물을 이용했지만, 여자의 경우 차를 타고 멀리 있는 산 뒤로 돌아가거나 심지어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해질 무렵,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포장도로인 ‘히말라야 프로젝트 도로’의 한 자락을 달려 레의 숙소로 돌아오는 길. 랜드 크루저에 몸을 실은 제작진들은 어느새 라다키들처럼 얼굴이 검게 타 있었고, 고산병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오지에서 광고찍기. 15초, 20초로 편집돼 전파를 탈 짧은 광고지만, 그 제작현장은 여느 영화촬영장 못지않게 치열했고 꼼꼼했다. 짧은 몇 장면에 가장 좋은 것만을 담아야 하는 광고는 어쩌면 본래 영화보다 더욱 긴장을 요하는 매체일지 모른다. 영화기자의 눈에 그 작업광경은, 레의 풍광만큼이나 낯설고 신선했다. 하쿠호도제일이 기획하고 호주의 베이스캠프와 인도의 카스 무비메이커가 진행, 프로덕션 쥬가 제작한 이 광고는 4월부터 TV에서 볼 수 있다. 레=글 최수임·사진 김기영/ 하쿠호도제일 PD
감독 김종원
키아로스타미처럼…
김종원(45) 감독의 별명은 ‘광고계의 임권택’이다. 자연, 동물, 어린이 등이 등장하는 휴머니즘적인 광고에 있어 국내에서 가장 인정받는 감독으로, 롱테이크를 즐겨 쓴다. 주요 작품으로는 ‘레간자 풍뎅이’편, ‘레조 안을 보라’편, ‘디오스 밀밭’편, ‘화이트 인터뷰’편, ‘삼성 르노자동차 누구시길래’편, ‘SK텔레콤 친구’편, ‘김삿갓 소주’편 등이 있다. 포스코 광고 시리즈 중에서는 ‘철길’편이 그의 작품. <어둠의 자식들>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조감독을 하기도 한 그는 이번 광고에 대해 “전혀 꾸미지 않은 다큐 같은 맛을 내려고 했다. 2년 전 딕시 곰파에서 ‘레조 안을 보라’편을 찍을 때 본 축구하는 꼬마들의 모습과 영화 <컵>에서 인상을 받아 만드는 작품이다”라며 연출의도를 밝혔다.
사진설명
1.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을 배경으로 공 없이 깡통으로 축구하는 어린이들을 그리는 ‘깡통’ 편은 레 근처에 적합한 장소가 없어, 사막지대에 세트를 짓고 촬영됐다. 인도 스탭들이 세트를 설치하는 모습. 실제 난민촌의 모습을 모델로 만들어진 세트는 모니터 속에서 실감있는 거리풍경으로 되살아났다.
2. 모니터 앞에 모인 스탭들. 맨 왼쪽 모자 쓴 아저씨는 렌즈 하나 갈아끼울 때도 회의를 하던, ‘컬트’ 기자재담당 트리오 중 한 명. 그 옆 썬글래스 낀 멋쟁이 인도 아주머니는 카스 무비메이커 소속의 의상 코디네이터 아루나다. 맨 오른쪽 뒤 안경쓴 승려가 딕시 곰파의 스물여섯 살짜리 젊은 교사. 가운데가 김종원 감독, 그 오른쪽은 기획사 하쿠호도제일의 윤성원 AE다.
3. 아프가니스탄계 어린이들이 모니터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외모와 복장이 사뭇 다른 라다키들과 아프가니스탄인들. 티없이 맑은 표정만은 같았다.
4. 실타래가 아닌 진짜 공으로 리허설을 하다 공이 개울에 빠져버렸다. 승복을 걷고 물에 들어가 공을 건네는 한 동자승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