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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너무 많이 줘서 신필림 나왔어”
2002-03-06

1960년대 신상옥, 이만희 감독과 작업, 의상마저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해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 감독의 ‘춘향이’ 대결이 화제였어.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최은희와 막 샛별처럼 떠오른 김지미를 두고 누가 더 연기를 잘하느냐,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온통 관심이 쏠렸지.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내가 의상을 맡았어. 하지만 이 흥행 대결은 어느 정도 결과가 예상되는 싸움이었어. 당시 최은희의 인기는 김지미를 압도할 정도로 절정에 오른 것이었고, 신상옥의 작품 역시 홍성기 것보다야 입소문이 잘 났어. 예상대로 신상옥의 <성춘향>이 홍성기의 <춘향전>을 훨씬 앞지르며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안았지. 두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훨씬 화려하고 정교했어. 홍 감독이, 어리고 예쁜 김지미의 매력을 한껏 살려달라고 부탁해서 장식이며 바느질에 훨씬 공을 들였거든. 최은희는 자신의 옷을 직접 지어 입었기 때문에 <성춘향>에선 그저 엑스트라만 챙기고 말았지.

다행히 60년대 들어서 갑사니 준중사니 하던 것에서 인조갑사와 포프린 등 합성섬유들이 더 추가됐어. 물론 60, 70년대 촬영 현장이라고 나아진 건 없었지. 동대문시장에서 천을 끊어와 손수 나염을 해야 했는데, 요즘 파스텔톤이라 부르는 색상을 그때 혼자서 만들어 썼던 것 같아. 나염한 갑사와 준중사에 풀을 먹일라치면 나중에 마르는 과정에서 그 냄새가 아주 굉장했어. 인조갑사하고 포프린은 또 어떻고. 나일론 제품들은 방충과 방부를 위해 옷감 전체에 포르말린을 뿌려 놓는데, 바느질을 할 때 그 냄새에 눈을 못 떠. 눈이 시큼거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고운 옷감에 들러싸여 있자니 기분은 천국이지.

예전에는 너무 천들이 없어서 고민이었지만, 어느 정도 골라 쓸 형편이 되자 다시금 의욕이 생겼지. <춘향전> 찍을 때 그래서 열심히 의상을 만들었어. 감독이 특별 주문도 했겠다, 김지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나름의 옷 짓는 노하우가 모두 동원됐지. 의상이 다 지어지면 일일이 다림질을 해야 하는데, 다리미에 쓸 숯을 피우는 것도 큰 일이었어. 그럴 땐 조명부나 촬영부 사람들이 도와줬어. 그이들이 숯을 피우는 동안 나는 배우들 머리를 빗기고. 숯 다리미와 발로 밟는 재봉틀은 현장의 필수품이었어. 그 두개만 있으면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았지.

그렇게 신이 나서 일을 했는데도 <춘향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아무 돈도 받지 못했어. 다만 한 무더기의 의상만 손에 돌아왔지. 그 순간 퍼뜩 이 의상을 그냥 버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역사적 고증도 확실한 옷들이기에 충분히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했거든. 그래서 그 작품부터 의상을 모으기 시작했지. 그게 시작이었어.

<성춘향>이 끝나고 신 감독이 신필림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더라구. 그땐 뭐 누구 소속으로 일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 그래서 얼른 그러마고 했지. 그래서 신필림 소속으로 찍은 작품이 같은 해 <연산군>(1961)과 이듬해 <폭군 연산>(1962)이야. 왜 두 작품만 찍고 나왔느냐, 돈을 너무 많이 주는거야. 다른 의상하는 사람들이 2만원을 받으면 나는 6만원을 주는 거야. 난 이게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구. 하루는 신 감독과 동향인 제작부 김씨에게 물었어. “날 돈을 이렇게 많이 줘도 돼? 회사는 문제없어?”하니까 그이 하는 말이 “문제없긴요, 그냥 허세죠.” 그 말 듣고 바로 나와버렸어. 돈이 없어도 맘이 우선 편해야잖아.

신필림을 나와 다시 예전처럼 식구들이랑 밑에 애들 몇을 모아 인현동에 집을 얻었어. 1층은 창고로 쓰고 2층에서는 옷을 지으면서 다시 새 작품을 맡았지. 60년대 중반으로 가자 국군이 주인공인 반공영화가 이만희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어. 그러자 이번에는 군복과의 싸움이 시작됐지. 군복의 종류만 해도 일본군(그 가운데서도 패잔병의 군복이 따로 있었고), 인민군, 중공군, 미군, 노서아군(러시아군), 국군이 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나라 군인들의 옷이 제일 까다로웠어. 다른 나라 군복은 대체로 형태가 잘 바뀌지 않는 반면에 우리나라 군복과 경찰복은 시기마다 달라지니 이거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지. 게다가 그땐 국군보다 타국 군인이 멋지게 입고 나오면 사상을 의심받아 끌려가던 때였어. 일년에 두번 있는 반공교육이나 이북영화 관람도 그런 이유에서였지. 몸에 걸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나 심지어는 밥그릇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우리보다 못한 것으로 비쳐져야 했어.

그런데도 이만희 감독은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필두로 (1965)을 만드는 와중에도 그이가 습관처럼 하던 말이 ‘인민군이 한번 멋지게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였으니까. 그러다 드디어 사단이 나고 말았어.

구술 이해윤/ 1925년생·<단종애사> <마의 태자> <춘향전>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email protected]